나다니엘 보기

HOME > 거듭난자들 > 버가모 > 나다니엘 > 보기

제목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차이

작성자나다니엘

작성일2019-07-05

조회수86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차이

사도행전16:6-10

 

제자들이 기록한 성경에는 예수와 성령에 대한 것만 기록한데 반해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에는 성령뿐만 아니라, 예수의 영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죄를 사함받고 성령만 받은 상태에서 사역한데 반해, 사도바울은 예수의 영과 더불이 성령도 받은 상태에서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특별히 사도바울을 택하신 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더 나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장차 사도바울 같은 자를 통해서 이방인들 앞에 가겠다는 예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구원이 사도바울과 같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이 들어가야 완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빛(영)으로 나타나신 것을 보자, 그만 눈이 멀게 되는데 그 순간이 바울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빛으로 들어가신 순간이다. 바울이 눈이 멀게 되자, 예수께서 제자인 아나니아에게 나타나 바울에게 안수하도록 말씀하심으로 바울이 다시 보게 되는데, 그때 바울이 성령을 받게 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마음의 죄를 사함 받고(13:10),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해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고 사역한데 비해, 사도바울은 마음속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성령을 받고 이방인의 사역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의 사역과는 차이가 있다.

 

본문16:6절에서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7절에서는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 마음속에서 성령과 예수의 영이 역사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잔히려고 하자 먼저 성령께서 일차적으로 막으신다. 그러다가 바울이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다시 아시아에 근접한 비누니아로 가고자 하니까 예수의 영이 바울의 자유의지를 제한해서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과 예수의 영으로 말미암아 철두철미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방인의 사역이 유대인의 사역에 비해 단순하지 않고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속에는 아직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어도 성령이 막지 않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이 그것을 무시하고 결국 자기 뜻대로 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는 이방인에게 주신 성령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영적인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하는 율법의 역할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가는 모든 것이 성령을 거역한 죄로서 자범죄에 해당된다.

 

사도바울 앞에 나오는 자들은 구원을 받았다. 사도바울에게 속하는 자들은 다 구원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사도바울 속에 계신 예수께서 그 앞에 나오는 자들의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라도 사도바울을 따라 다닌 자들은 구원을 받았다. 이방인들은 바울을 통해 성령 먼저 받고 바울로부터 마음의 죄(자범죄)를 사함 받아 온전한 구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통해 성령만 받고 바울을 배척하여 자기 노선을 구축하고 따로 간 자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자들을 향해 바울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하면서 책망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원죄만 사함 받고 그 증거로 성령만 받았지 바울로부터 자범죄를 사함 받지 못해 육신의 소욕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결국 육신의 소욕을 따라감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바울을 통해 성령을 받고 끝까지 바울을 좇는 자들은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그 마음판이 바울을 좇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고 예수의 영이 그 속에 있어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바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을 받고 자기도 바울처럼 되었다고 착각하여 떨어져 나간 자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바울이 죽은 후, 성령만 받았던 자들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 때는 이미 예수가 빠진 복음으로서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만 받게 한다. 이는 단지 성령으로 하나님 백성을 만드는 사역인 것이다.

 

이는 예수 이름만 불러도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의 피의 공로로 원죄를 사함 받고 성령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울이 죽은 후에는 예수가 빠진 복음이 전해져 내려와서 지금까지 우리 이방인에게 성령을 받고 하나님 백성만 되게 하는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구원 과정은 율법 아래 살았기 때문에 우리 이방인과 다르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마음의 죄, 즉 율법을 범한 자범죄를 사함 받았고, 예수께서 피를 흘리게 되자 그 피의 효력으로 아담으로부터 내려 온 원죄를 사함 받아 그 증거로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사역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성령을 받으면 구원이 완성되고 이미 마음의 죄를 사함 받은 상태에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들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하게 된다. 영과 혼 사이에 있는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강하게 받을 수 있었으므로 성령만 받고도 사역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으로 표적을 나타내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게 된다.

 

성령이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신다.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먼저 율법을 범한 마음의 죄를 사함 받게 되고 그 후에 예수께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함 받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된다. 이것이 유대인의 구원 과정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사역은 이처럼 성령으로 표적을 나타내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단순한 사역이다. 성령의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율법을 범한 죄를 사함 받고 원죄까지 사함 받아 성령을 받으면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성령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게 되어 성령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 함은, 그들이 성령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음으로 율법이 지시하는바 율법의 참 정신인 의와 인과 신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아래 살았기 때문에 주의 이름만 불러도 율법을 범한 죄를 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구원에 들어가게 되지만,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원죄를 사함 받고 성령을 먼저 받게 된다. 원죄는 사함 받았지만 자기 스스로 지은 자범죄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다.

 

영은 예수의 피로 해결되었지만 아직 혼적인 죄, 즉 마음의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의 죄는 성령을 받고도 성령을 마음으로 따라 살지 못하고 성령을 거역한 죄를 말한다.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영적인 율법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모든 것이 자범죄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의 법을 따라 살 수 없다. 성령의 법은 신약성경에 기록 된 모든 말씀으로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정죄의 법으로서 용서가 없고 그것을 어기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인간이 지키지도 못할 법을 주셨는가? 그것은 율법으로 자기 백성을 죄 아래 가두신 후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방인들은 율법의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 처음부터 죄의 싹이 자라나 죄성이 강하기 때문에 죄의 근원인 죽은 영을 빼내고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들어가셔야 구원이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심으로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이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율법을 범함으로 외부에서 죄가 마음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만 불러도 죄사함이 이루어지지만, 이방인들은 죄의 근원이 애초부터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빼내고 주인으로 들어가셔야 구원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마음판이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구원의 방식도 그만큼 다른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성령이 구원의 완성점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성령을 받는 순간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시작점에 불과하다. 성령을 받는 순간부터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성령을 처음 받았을 때는 충만해서 죽은 영이 수면 아래로 내려가 힘을 못 쓰고 있다가 그 충만함이 점점 사라지게 되면서 다시 기독교인들 마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방해함으로 점점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마음속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영을 관할하고 계시는 것이지 육체를 입으신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 속에 들어오실 수 없다. 인간 속에 들어오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영이 되어 인간 속에 들어오시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보면 영적인 위계질서가 뚜렷이 보이고 우리 인간의 구원의 원리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는 우리 인간의 영. . 육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어 지으신 것으로서 우리 인간의 영과 혼이 다 해결되어야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영과 혼이 어떤 원리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가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먼저 지성소는 인간의 영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영역, 즉 하나님이 관할하시는 곳이다.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는 하나님의 엄위와 권능을 의미하며, 인간의 영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2:7) 하나님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영이 원죄로 말미암아 마귀 발아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원죄를 사해주시고 그 증표로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인간의 영을 마귀에게서 건져내시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이처럼 아담이 범죄할 때 하나님이 떠나고 그 자리를 꿰차고 있던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소는 인간의 혼(마음)에 해당되는 곳으로 예수께서 담당하시는 부분이다.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은 떡으로서 예수의 살(6:51)을 의미하는 것이고, 금 촛대는 예수의 빛, 향로는 우리의 중보자로서의 예수의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자리는 예수께서 계셔야 되는 자리인데 현재 기독교인들 마음에는 죽은 영(세상 영)이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성령을 받고도 여전히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일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사도바울 같은 삶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가시게 되면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절대 세상 것을 취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고도 성화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첫사랑이 식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고 죽은 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 의미는 아직 하나님 자녀가 되지 못하고 백성의 신분으로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 아래서의 삶은 이처럼 처음과 끝이 다르다. 성령을 받게 되면 처음에는 뜨겁고 충만해서 세상을 버리고 오직 주만 따라갈 것 같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충만함이 사라지고 점점 세상에 젖어드는 것을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이방인은 기독교인이 되어서도 세상과 경계를 둘 수 없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저들과 타협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룰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또 다시 죽은 영이 활개를 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끌고 가버리는 것이다. 성령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멀어지는 것은 인간 족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애쓰고 힘써 하나님 쪽으로 가려고 하면 성령의 역사도 체험하게 되고 그만큼 충만해 지지만 마음에서 멀어지면 하나님의 존재도 희미해진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이다. 결국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충만함을 다시 회복해보려면 힘쓰고 애써 금식하고 부르짖고 해야 겨우 또 조금 가깝게 갈 수 있다. 기독교인들 마음이 항상 갈급하고 목마른 이유가 바로 성령아래서는 이처럼 하나님이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뭔가 확실한 것을 부여잡고 끝까지 가고 싶지만 마음뿐이고 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음이 갈급하다보니 귀신의 역사에 홀려 잘못된 길로 가게 되거나 이단으로 끌려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첫사랑을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모든 원인은 성령이 구원의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영적인 율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죄인임을 인식케 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작게 들어오시지만 점점 자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화라는 것이다. 성령은 자라지 않는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육체를 입으셨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 속에 들어오실 수 없고 우리 영만 관할하고 계신다.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분은 육체를 입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해서 영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면 삶이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끌고 가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죄악으로 달려가도 강력하게 막아주지 않는 것이다. 성령은 법으로서 하라 하지마라 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다. 그것을 어기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마음의 죄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성령을 받았고 그리스도가 마음에 없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살 수 없다. 처음에는 충만했지만 결국 타락으로 가게 된다.

 

그럼 왜 성령을 주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바울은 율법 있기 전에도 죄가 왕 노릇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령을 안 받았어도 어차피 인간은 죄 때문에 사망이라는 뜻이다. 신앙생활 안 하고 성령을 안 받아도 사망이다. 성령을 받은 결과는 성령을 어긴 죄인으로 드러난다. 결국 성령의 법이 의도하는 바는 바로 성령을 거역한 죄인임을 인식하라는데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앞에 달려 나와 자기 죄를 토설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순종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해 주시고 그 속에 주인으로 좌정하시게 되고 그것이 곧 구원이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관하시며 이끌고 가시게 된다. 세상 속에 살고 있어도 세상에 끌려가지 않게 자유의지를 제한해 주신다.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면 가장 큰 유익은 마귀가 더 이상 청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천국의 자녀라 할지라도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습관에 따라 육체로 죄를 짓는다 해도 이미 그리스도께서 피와 살을 주어 담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마귀가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요일5:18) ).

 

그러나 성령 아래서는 죄의 근본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죄가 되므로 마귀가 청구하여 물질의 손해를 입거나 몸에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 날 마귀가 자기 것이라 하여 자기 거처로 끌고 가는 것이다. 하나님 것이 되려면 성령을 거역한 마음의 죄를 사함 받고 그 속에 양자의 영을 모셔야 진짜 아들의 신분이 되어 하나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은밀하게 기독교인들 앞에 와 계신다. 자신이 진정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죄인이라면 다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진짜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란다.

 

 

첨부파일 다운로드: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미투데이 공유
  • 요즘 공유
  • 인쇄하기
 
이름 : 비밀번호 : 스팸방지코드 :
하단로고

새한중앙교회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584-1 

Tel : 031-774-6301 / Fax : 031-774-6305 

선교비후원계좌 : 농협 351-0930-6631-83(새한중앙교회)

Email: ksk6307@naver.com / h0sea@naver.com

Copyright ⓒ 2013 새한중앙교회 /  정보관리책임자:김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