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보기

HOME > 거듭난자들 > 버가모 > 나다니엘 > 보기

제목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작성자나다나엘

작성일2019-07-12

조회수70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20:24-29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던 도마 앞에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말씀하신다. 보고 믿는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참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보이는 것을 믿는 신앙생활이다. 형식과 절차를 따라 예배드리고 어떤 규칙을 정해놓고 짜여 진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예배 순서를 정해놓고 그 순서에 따라 늘 똑같은 형식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은 마치 제사 의식과 같다. 그것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각종 예배로 넘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예배를 드려도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도 없다. 마음은 없이 형식적으로 타성에 젖은 종교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으로 굳어져 있다. 주일성수하고 새벽기도를 하고 십일조를 잘하며 충성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 백성이 지켜야 할 법으로서 의무이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은 마음 중심에서 그 분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늘로서 내려오는 표적을 구했듯이 기독교인들 역시 능력을 나타내는 목회자들을 선호하고 화려하고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좇게 되면 굳이 마음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형식적으로 행위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구약의 제사의식과 다를 바 없다. 구약의 모든 제사의식은 장차 오실 예수의 모형으로서 온전치 못한 것이다. 그것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못함이라(10:4). 참 믿음은 예수가 오셔야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진짜 믿음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율법에 따라 소나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모형으로써 몸으로 그 의식을 행하면 되지만, 예수는 그 모형을 이루려고 오셨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제사의식은 유대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의 모형이고, 기독교 신앙은 부활해서 영으로 이방인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소와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은 속죄 양으로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이 예배드리는 것 역시 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기독교인의 믿음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먼저 첫 것으로 모형을 주시고 육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를 보여주신 후에 둘째 것으로 실체를 보내주셔서 그로인해 구원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첫 것은 율법이고,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첫 것은 성령을 따라 살으라고 하는 성령의 법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둘째 것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둘째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믿어야 율법을 범한 죄를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고, 이방 기독교인들은 부활해서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성령을 거역한 죄(자범죄)를 사함 받고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

 

성령을 거역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믿음은 완성될 수 없다. 마음속에 죄가 아직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에 죄로 인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함으로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령의 법을 온전히 이루려면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들어오셔야만 가능하다. 성령의 뜻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성령의 음성만 억지로 들으려고 하다 보니 성령의 음성 대신 귀신의 음성을 들음으로 이단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단들의 특징을 보면 하나같이 성경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자기 것으로 삼아 거룩을 최대한 위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림 예수’, ‘보혜사 성령’, ‘감람나무’, ‘이긴 자등 이러한 타이틀을 달고 자기를 하나님처럼 보이도록 유도함으로함으로 마귀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가 또 사람을 통해 이렇게 신령한 척 하나님 흉내를 내면서 영혼들을 사냥하는 것이다. 마귀의 역사는 이렇게 사람들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 들여 자기를 추종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들어오시게 되면 이와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사도바울에게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들어가시게 되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자기라는 존재를 죄인 중에 괴수로 바닥에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의 참 모습이다.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가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심으로 하늘까지 높아져 있었던 데서 내려와서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마음으로 안 믿어도 된다. 모든 것이 형식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예배드리고 적당히 헌금하고 적당히 봉사에 참여하면서 하늘나라 티켓만 받으려고 하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영적인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믿지 못하고 입으로 예수 이름만 부르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다. 입술에는 예수가 넘쳐나도 삶에는 예수가 빠져 있는 것이다. 마음이 빠져 있는 것은 하나의 종교생활에 불과하다. 행위로만 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종교생활이다. 종교는 속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술을 끊고 담배를 끊는 껍데기 변화는 있어도 속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오시게 되면 이 모든 형식과 절차를 폐하게 된다. 형식과 절차를 좇으면 인간은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하게 되면 인간은 그것 자체를 신앙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것을 해서 해결된 것이 무엇인가? 우리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의 문제인 것이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희망도 없다.

 

그것 때문에 모든 고통이 왔고 결국은 지옥으로 가야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형식적으로 예배만 드리고 있지 정작 마음에 있는 죄 문제는 손도 못 대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이다. 자기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에만 역시하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을 헐라고 하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폐하고 당신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을 받고 신앙 생활하는 기독교인들의 한계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해결책이 없고 속 시원하게 앞길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없다. 문제가 있어 하나님께 응답 한 번 받으려면 금식하고 부르짖어야 겨우 응답을 받게 된다. 그것도 대충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낼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가로채서 응답하면서 그 사람을 교묘하게 끌고 다니게 된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다. 불신자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자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마음 중심에서 찾게 되면 거기에서 건져 주시게 된다. 그러나 믿는 자라도 대충 마음도 없이 기도하면 들어주시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아직 하나님 백성의 신분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아직 하나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의 피 흘림을 통해서 각 사람의 영에 오셔서 그 영을 보호하신다. 각 개인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예수의 피 흘리심으로 그 피의 효력으로 마귀를 멸하고 원죄를 사함 받은 자의 영을 마귀가 다시 지배하지 못하도록 성령께서 보호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있던 우리 영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오직 믿는 자의 보호자로서 불신자가 부르면 응답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감화 감동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 속의 죄악 때문에 그 음성들 듣지 못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 영을 관할하고 그의 영역 안에 두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음속에 오셔서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시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오시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에게 말하듯이 조근 조근 인격적으로 말씀해 주신다. 그래서 그 음성을 누구든지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감으로 완벽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게 되면 더 이상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무형교회가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사람 손으로 지은 유형교회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길을 친히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아직은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다. 성령은 우리 영을 보호하러 오셨지만 그것으로는 불완전하다. 그 음성을 듣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뜻대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령 아래서의 신앙생활은 행함이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행함이 없다는 것은 듣기만 하고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산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행함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신다. 그리스도가 이미 주인으로 좌정하여 당신 뜻대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영적인 율법으로 오셨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제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그것을 강력하게 막아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법의 완성자로 오셨다. 그래서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사해주시고 그때부터 온전히 성령의 뜻대로 살 루 있도록 속에서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해 모두가 다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어있다. 이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속에 와 계신다. 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라올 것인가?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첨부파일 다운로드: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미투데이 공유
  • 요즘 공유
  • 인쇄하기
 
이름 : 비밀번호 : 스팸방지코드 :
하단로고

새한중앙교회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584-1 

Tel : 031-774-6301 / Fax : 031-774-6305 

선교비후원계좌 : 농협 351-0930-6631-83(새한중앙교회)

Email: ksk6307@naver.com / h0sea@naver.com

Copyright ⓒ 2013 새한중앙교회 /  정보관리책임자:김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