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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

작성자벧엘

작성일2019-07-06

조회수62

제목 :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
본문 : 사도행전 16 : 6~10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직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으면 천하의 누구도 알 수 없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이방인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마태복음 1:21).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여정이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같다고 믿고 있다. 유대인은 이미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살았다. 즉 유대인은 삶 자체가 율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들의 삶의 모든 부분(종교,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군사, 산업, 미디어, 사상 등)이 하나님의 보호 속에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살았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판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마음의 근본은 상대적이어서 한 사람의 올바른 마음은 항상 대상이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 혈통도 같은 의미가 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을 볼 때, 아벨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이미 가인은 마음의 근본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같을 수가 없는데,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것을 교묘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자기의 욕심이 결국,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으셨다(창세기 4 : 15). 그 후에 아벨 대신 아들 셋을 주셨다.

 

그러나 죄악의 누룩이 들어온 이상 그 죄악을 인간은 결단코 이겨낼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창세기 6 : 2)을 하면서 급속도로 죄악은 퍼져 나갔고, 하나님은 죄악의 관영 함을 보시고 한탄하시고 홍수로 심판을 하신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방주를 만들어서 살 수 있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셨다(창세기 17 : 4). 앞서 언급하였듯이 죄악이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번져 나가게 되고, 결국, 그 죄악으로 인간은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을,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애굽이라는 상황을 통하여 그들을 체험하게 하고,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 수 있게 하였으나 결국은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쳤다.

 

율법을 지키고 의에 이를 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노력이 의가 되어서 율법의 온전한 의미를 점점 퇴색시켜 버렸다. 이처럼 유대인은 율법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어느 민족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율법까지 주었다고 하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살았고, 지금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아를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사야 7 : 14, 미가서 5 : 2 )을 하고 있었음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만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인 해방을 해주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의외로 누가 보아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유대인들은 믿을 수 없었다(이사야 53 : 1~6).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회에서 제외를 당하고 삶 자체가 동떨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들이 당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들이기 위하여 당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기세가 등등하게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얼마나 강한 빛이었던지 앞을 볼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바울이 누구인지를 물었는데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니 바울은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 수밖에 없었다. 아나니아를 만나서 안수를 받고 눈을 뜨게 되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권적으로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오셔서 그를 전폭적으로 주장하시게 되니, 그가 앞을 볼 수 없었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안수를 받고, 눈을 뜨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사도행전 9 : 17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성령의 은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메섹 도상으로 같이 가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군가가 말을 하는데 누구인지도 모르고 같이 가던 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이 일을 통하여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은 안수를 통해서 받을 수 있다. 그 받은 것의 증거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았던 눈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빛으로 바울에게 오셨던 그리스도는 누구도 알 수 없게 오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 후서 4 : 18).” 고 말씀하고 있다.

 

유대인이면서 로마인이었던,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받고 제자들도 모르는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바로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도록 오시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바울도 장차 인격을 가지고 이방인 속에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는 사실이다(히브리서 10:9).

 

다시 성령의 사역으로 돌아가서 성령은 우리 조상 아담이 지은 원죄를 통하여 인간을 떠나셨던 하나님이 죄 없는 피로 인하여 예수를 죽게 하심으로 이제 그 원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증거로 성령을 주신 것인데, 이 성령을 주신 것이 자신들이 잘해서 무엇을 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이 없으시고, 인간 마음속에 더더욱 오실 수 없다. 인간은 죄가 있기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곧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사무엘 상 6:19). 인간 마음속에 오실 분은 예수인데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 죄악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셨고 영이 되시어서 인간 마음속에 오셨다.

 

여기서 인간의 구조를 생각해보자. 인간은 영(), ()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혼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육은 혼이 지배하는 자를 따라간다. 이것을 영적인 질서라고 한다. 성령의 보호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의 영향권 아래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고 감동을 주셔서 살아가는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건드리지 않고 감동과 감화를 주시는데, 그것을 누구도 지킬 수 없다. 결국, 인간의 본질 속에 있는 죽은 영은, 자유의지라는 것을 무기로 삼아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려고 갖은 방법을 다한다. 그러나, 인간의 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오셔서, 주인으로서 오직 인간의 본질을 주장해서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도록 하신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 전하는 것을 성령이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 후로 바울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도록 힘써 보았으나 그리스도의 영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미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계셨고 후에 성령을 받으면서 이방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당시에 예수의 제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면서 바울의 지적을 받는다(갈라디아서 2:11~16, 3:1~3). 이것은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사역의 다른 점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령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여하여 자신이 결정하도록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은, 이미 인간의 중심에 좌정하시어서, 인간의 육신의 본성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가 주장하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성령은 일시적이기도 하고, 단회적이기 때문에, 지속해서 충만하고, 뜨겁게 유지될 수 없다. 다만 충만하게 뜨겁게 되었다면 언제까지 거기에 매여 있으려고 안주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마음속(본질, 자아, 죽은 영)에 자리 잡은 소욕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더 깊이 숨어 들어가고,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제 성품(본질, 자아, 죽은 영)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주 작은 겨자씨같이 시작한다. 그러면서 실제로 점점 장성해 가는 것이다.

 

성경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변화되는 모습(내면적인 변화)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린도전서 5:6). 그 이유는 씨앗이 자라는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마태복음 13:31~32, 마가복음 4:26~29, ).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잣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반대이고,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와 사역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자들은 마음속의 역사와 현실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비교해보면, 육신의 눈으로도 일부 이해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에베소서 1:18). 마음의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전혀 상관이 없다. 그 중요한 마음의 눈을 내가 열 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야 그때 볼 수 있게 된다.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 좋은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만나면, 좋은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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