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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작성자벧엘

작성일2019-08-03

조회수44

제목 :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본문 : 히브리서 10:9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목적이 없이 된 것이 없다. 조물주의 목적을 이룰 때 모든 피조물은 올바로 쓰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갈 때, 하늘의 뜻을 이루어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누구도 하늘의 뜻을 이루어 갈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태생이 죄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늘의 뜻을 도무지 이룰 수 없다. 죄악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한 하늘의 뜻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하늘과 땅은 다르듯이 하늘의 깊으신 뜻을 땅의 것으로 알 수가 없다.

 

죄악의 육신으로 된 인간이 죄악의 것으로 하늘의 뜻을 이해하려고 한들, 이해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땅()의 것으로만 이해되는 것이지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이 한 공간에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되지 않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 빛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죄악이 어두움이라면 선은 빛이시다. 그 빛은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비춰 주신다, 다만 그 빛을 깨닫고 빛으로 나오는 자는 밝은 세상에서 살 수 있지만, 그 빛을 싫어해서 나오지 않는 자는, 그 암흑 속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

 

빛을 비춰 주셔서 그 빛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그 좋은 예가 인간에게 주어진 마음속에 빛으로 조명해 주시는데, 그 빛을 알고 그 빛의 인도를 따라서 자신을 버리고 나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다. 그 좋은 예가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상기시켜 주셨다. 그러나 마귀의 간교한 계략에 넘어져서 결국, 선악과를 따먹게 되고 인간에게 치명적인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만다. 좀 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 마음속에 그 말씀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지켰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자신이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악으로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인간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악의 근본인 마귀의 속셈을 여실히 드러내게 하시고, 결국,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성경을 보면 천지 창조 때부터 항상 두 가지를 대비시키신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모세와 여호수아’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알파와 오메가등등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두 가지를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두 가지를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아들 그리스도를 들어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그 아들에게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아들이 하는 일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모든 만물과 역사를 사용하시고, 인간을 사용해서 그 의미를 깨닫고 아들에게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영적인 질서를 어지럽게 한 루시퍼(마귀) 그가 행한 죄악으로 영계에서 지옥에 해당하는 이 땅에 내쫓김을 당한다. 마귀는 자신의 죄를 여지없이 들어낼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역사이고 그 주인공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책임을 지게 하셨지만, 결국, 마귀의 유혹에 넘어져서 원죄를 지음으로 인간과 함께 소통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죄를 범한 인간과 함께 있을 수 없으므로, 떠나시고 그 자리에 마귀가 들어와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죄를 범한 인간은 혹독한 죗값을 치르게 된다. 그 후 인간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는 방법은, 오직 흠 없는 인간의 피로 대신에 해야 하는데, 인간은 누구도 그 피를 내놓을 수 없다. 최후의 방법으로 죄가 없으신 예수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이다.

 

다시 구약의 시대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그 마음을 붙들고 쓰신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 좋은 예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들 수 있다.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데 둘의 마음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적어도 아벨은 자신에게 부여해 주신 것을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고, 온 신경을 써서 기른 양 중에서 흠 없는 양을 드렸으나, 가인은 다른 직종인 농사를 지어서 지은 곡물로 드렸는데, 그는 마음을 거기에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가인과 같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 마음속에 틀을 잡은 죄악(본질, 자아, 자신, 죽은 영)이 기회만 있으면 올라온다. 문제는 그 마음속의 본질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이나 결국,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은 보시고 아벨, 에녹, 노아와 많은 자를 쓰셨다. 그 의인들을 의로 여기셔서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함께 구원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으나 이들의 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것은 없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붙들고 쓰셨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 한 혈통을 뽑아서 세우셨고 그를 통하여 모든 육신의 것을 정리한 후, 그 아들 이삭을 드리게 하므로 그를 의로 세우시고, 그 혈통을 세우셨다. 오늘날 유대인들에게도 자신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만 자랑하고 있지 그 중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선대들의 믿음의 명맥은 점점 살아지고, 흔적만 남게 되고, 결국 이들에게 애굽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은 후,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게 되었는데, 기성세대는 죽고 새로운 세대에게 광야에서 율법을 주어서, 그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그 율법을 주신 진정한 뜻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다.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이제 아들이 올 때 아들 앞으로 나오라는 것인데, 이것을 잘못 해석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의 선조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그 율법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살아왔고, 주변 강대국의 틈 속에서 힘들게 살아온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서, 그들의 신앙은 형식화되어가고 제도화되어가면서, 율법의 본래 목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본질에서 멀어졌다. 많은 선지자와 예언자들이 이들의 외식과 위선을 낱낱이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이처럼  2천 년이 지난 후에 메시아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는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해방을 해 주는 메시아를 대망하였는데, 정치적인 해방을 해 주기는커녕,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실망한다. 예수는 당시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였다. 율법을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지키지 않았고, 율법을 어기고 죄인들과 어울리고, 심지어 성전을 헐라고 하였고, 성전에서 그들이 행하는 관습을 뒤엎어 버렸다. 결국,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를 공모(共謀)하고, 그 계획을 실행하여 결국 십자가에 죽게 했다.

 

예수의 시험 받으신 사건을 다시 한번 조명해보면, 예수의 사역 직전에 시험을 받으신 사건은, 영적인 세계에서 사역을 시작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며, 악한 영들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포고이다. 이 공개적인 시험을 통하여 악한 영들을 제압하고, 물리치시고, 하늘의 권세를 선포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받아야 하는 3가지의 시험에서 완승하심으로, 마귀는 완패당하여 떠나고 사역의 시작을 하셨다. 오늘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누구도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을 보면 앞서 언급한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육체에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씀을 앵무새처럼, 외우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우리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논리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를 잊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미 태어나면서 율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율법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앞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그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아 본 적이 없고, 율법을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율법의 보호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죄악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 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방인은 원래 태생이 죄악으로 태어났고, 이미 마음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져서 죄악이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율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방인들은, 이미 예수께서 피 흘려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것이 이제부터 성령의 뜻대로 살아보라고 하는 것이다. , 유대인들이 육체에 율법을 받았듯이, 이방인은 마음에 율법을 받은 것인데, 이것을 가르쳐서 영적인 율법이라고 한다. 즉 마음으로 그 영적인 율법을 따라서 살아보라는 뜻이고,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뜻대로 살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부여된다. 이를 가르쳐서 이제 백성이 된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예수 앞으로 나오라는 뜻과 같이, 이방인들은 성령의 뜻대로 살 수 없음을 아시고, 이제 육으로 오신 예수는 이 땅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기 때문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과 같이, 영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받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다.

 

이제 이미 그리스도께서 도적같이 오셔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 도적같이 오신다고 하신 것을 막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자는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작은 자란 어떤 자인가? 보잘것없는 존재를 말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면 이미 육으로 오신 예수는 없고 어떤 형태로든 오시는데 나팔을 불고 의장대를 앞세우고 많은 사람의 호위를 받으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반대인 모습으로 오셨는데 이를 도적같이 오셨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속에 죄를 물리치시고 그 마음을 속에 좌정하셔서 임재하시고 역사하신다. 작은 씨로 오신 그리스도는 처음에는 누구도 모른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자의 씨와 여자의 난자가 만나서 착상이 되고, 그 착상이 될 때 여자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증거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아주 작은 씨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을 통하여 오시기 때문에, 인간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로 듣고 시인하면, 그 사람도 그리스도의 씨가 그 마음속에 착상하게 된다. 성경에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이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 말씀에 보면 말씀을 받고 뿌리를 내리는 씨앗이 있고, 말씀을 받으나 마음의 밭이 무뎌져서 뿌리를 못 내려서 씨가 죽는가 하면, 말씀을 받으나 염려와 재리와 일락으로 결실치 못하는 자가 있고, 새가 먹어 버린 씨도 있다. 그러나, 말씀을 받은 자도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는 씨앗도 있다. (마음 판)의 근본이 천차만별임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문제는 씨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여야 하는데, 남자의 씨가 여자의 난자를 만나는데 받아들이면 착상이 된다. 착상된 것, 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있지만,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착상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때부터는 태아가 엄마로부터 연결된 탯줄을 통하여 계속해서 영양분만을 받아야 한다. 다른 것으로 받으면 결국, 아이는 문제가 되고 만다. 엄마는 아이에게 유익한 것을, 계속해서 공급해서 자라도록 하게 된다. 결혼하여 남녀가 만나 받아들이면 임신이 되듯이,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고 시인하면 그리스도의 씨가 마음속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리스도 씨를 마음에 모신 자는 이제 세상의 것으로는 자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만 잘라가야 한다. 그 말씀을 듣고 계속해서 성장해 가면 결국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가 찾아와서 깃들이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를 모신 자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다 보면 몇 가지의 특이점이 나오게 된다. 먼저는, 세상의 것이 점점 멀어짐을 깨닫게 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는 육신의 것을 위하여 세상을 주인으로 알고 세상을 의지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면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시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거 해 주신다. 또 하나는 나 자신이 이렇게 허접하고 미련하고 나약하고 버림받아 마땅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신도 모르게 여과 없이 자꾸 드러낸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죄인 가운데 내가 괴수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자신의 육신을 보니 얼마나 치욕적인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그 치욕적인 것을 거침없이 드러냄으로 인하여 자신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는 결과가 된다. 나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도록 하시지만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시는 예도 있다. 결국, 자기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도록 하신다. 마치 바울이 자신이 가고자 한 아시아로 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곳(마게도냐)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 이와 같은 이유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두 가지를 연달아 말씀하시는 것은, 처음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 것이 없이 두 번째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율법이 없이 죄악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으며 죄악을 깨달음이 없이 복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성령의 역사 없이 예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수 없고 바울을 통하여 인간 속에 작동하는 죄악을 깨달았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원인(죽은 영)을 알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자신의 영이 살길이다. 예수의 사역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이어져야 한다.

 

처음 것과 두 번째 것은 무시하는 것이 아닌,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역할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인 위계질서를 세우시는 뜻이 있다.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9).”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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