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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을 보면 이방 기독교인들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작성자리브가

작성일2019-11-24

조회수79

야곱을 보면 이방 기독교인들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창세기32 :1~12


현재 신앙생활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야곱의 축복을 받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야곱의 축복이란 복음성가를 작사 작곡해서 부르고 또한 애틋한 마음으로 소원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 야곱의 속성을 알고 나면 애틋함과 소원하는 마음으로 그 노래를 과연 부를 수 있을까? 야곱의 본질을 알고 나면 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측면에서 육신의 것을, 함축해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 야곱의 삶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현재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모형으로 왜 주셨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방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리브 가의 자녀로 야곱은 형에서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난 것을 안다. 따라서 형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 다시 말해서 리브 가의 태중에서부터 다툼이 있었고 또한, 두 민족이 나누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창25:28)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미리 계획을 세워 놓으시고,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유대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을 구원할 것을 예표 하고 있다. 이삭은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야곱은 영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알 수 있다.


따라서 때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밝히 드러내시려 한다. 이삭과 야곱은 너무나 다른 성격과 취향이 있다. 순종하는 이삭은 이스라엘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에, 비해 야비하고, 연약하고, 차분하고, 내성적이며 또한, 험난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언뜻 보면 본받을 만한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실상 야곱은 우리 이방인의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방인의 구원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깨닫기 위해서 야곱의 성품과 그의 삶을 통해 그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 가는 야곱을 사랑한 것을 (창25:28) 알 수 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허기가 져 있으므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리브 가의 계략으로 야곱은 형에서의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강탈하고 형에서는 인간의 가장 근본인 인생 고 허기짐을 못 참고 중요한 장자 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겼다.


이것을 보건대 장자 권을 대수롭지 않게 팥죽 한 그릇에 판 사건으로 보면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야곱의 비열함과 담대하지 못하고 야비한 행동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이 말은 접어두고 유대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의 차이점을 한번 세밀하게 검토해보자.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 속에 살았고,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의의 혈통으로 부르셨고, 또한, 선택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이러한 선민의식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상에서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의의 혈통의 후손이 번창하게 되고 이집트로 이주시켰고 다시금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지키도록 하셨다.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한 족속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대로 살아 보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그 율법을 더욱 잘 지키기 위하여 613가지의 율법을 만들게 되었다.


이처럼 율법을 통하여 보면,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이 한족속을 선택하셨는지, 왜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셨다가 다시금 그들을 이끌어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는지, 그 중요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반면에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 누구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앞으로 나오라는 깊은 뜻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율법에 얽매여서 오직 율법으로만 구원을 얻는 줄 알고 있었다.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오실 그때 상황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하에서 살기가 힘든 시기에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나와서 메시아를 보내 줄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이 예언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정치적으로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하게 해줄 메시아로만 알고 있었다. 더욱이 예수는 흠모할 모양도 없고 나사렛 촌 동네에서 태어난 자로서 오셨기에 메시아로 인정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메시아를 대망하였으며, 진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메시아를 대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나타나서 더욱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데,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도 어기고 율법에서 금기시하는 자들과 친구가 되어 살고 있으니 그들의 처지로서는 도무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구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유대인들이 당신들의 사회구조로 볼 때 예수를 믿으면 그 사회에서 외면을 당하고 철회 당할 것을, 두려워함으로 예수를 믿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처럼 율법을 주신 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동으로 결국, 자신들의 의를 세우게 되었고 그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적하는 꼴이 되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야곱을 선택한 것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의 두 아들 가운데 첫째인 이스마엘은 버림을 당하고 이삭은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이삭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인 에서는 택함을 받지 못하고 야곱은 선택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장자인 에서는 선택받지 못하고 둘째인 야곱은 선택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스마엘과 에서는 세상 적이었고,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받은 자녀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녀라는 칭함을 받은 야곱을 살펴보면 이방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야곱은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고, 어머니 리브 가의 말에 따라서 형을 속였고 장자 권을 쟁취하였으며, 그 장자 권을 빼앗은 것으로, 말미암아, 유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 살면서 삼촌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속기기도 하였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형에서의 장자 권을 빼앗은 사기꾼의 본질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외삼촌의 재산을 빼앗는 일을 하게 되고 재산뿐만 아니라 라반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창세기 32장과 33장을 보면 야곱이 형에서가 400명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떻게든 머리를 써서 권모 수술로 대응하려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야곱은 심히 두려워 자기가 직접 형에서 에게 나가는 것을, 회피하고 협상하려고 한다. 자신의 소유 중에서 예물을 종들에게 맡겨 협상해 보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에서가 눈앞에 이르게 되자 야곱은 두 여종, 실바와 빌하를 앞에 세우고 그다음에 레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을 맨 뒤에 세우고 내보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의 방법을 다 포기하고 전 날밤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천사를 만나 밤새 씨름하여 환도 뼈가 위 골 되기까지 하여 축복을 받아낸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포기하고 직접, 에서 앞에 나가 무릎 꿇음으로 자기의 잘못된 과거를 인정하고 나갔을 때, 에서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물며 야곱은 이방 기독교인들의 앞에 오실 영적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반면에, 사기꾼 같은 기질이 있으며,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서 이긴 만큼 심지가 굳고, 에서와 맞설 만큼 거친 성격의 소유자고 지렁이 같은 자며 또한, 끈질긴 기질뿐 아니라 전형적인 이방인의 교활함과 철저히 계산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동시에 야곱은 부활하여 영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방 기독교인들은 율법에 지배를 받지 않고 살아왔기에 마음속에 죄악이 태어나면서부터 있었고 죄악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하지만 이제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살길이 열리게 되었다.


마치 야곱이 형에서와 회개하는 길이 열린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이방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예수의 피로 원죄를 해결해 주심으로 그 증거로 성령을 주셨는데 그것이 구원이라는 논리에 빠져 있다. ‘성령’은 ‘양자의 영’이 아니라 인간의 영에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어도 마음속에는 죄악이 그대로 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양자의 영’,즉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야 한다.


야곱이 형에서 에게 종들을 보내서 화친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방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구원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원죄를 사해 주심을 받은 증거이다. 야곱이 형에서 에게 물질과 아내를 보내고 거동을 보는 것같이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태도와 다를 게 없다. 형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대면하여 만나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얍 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이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하여, 순서에 의하여, 절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생결단하여야 한다. 현재 이방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문제를 육신 적으로 쉽게 지나가려고 한다. 여기서 야곱이 얍 복강의 씨름을 영적인 싸움으로 직접 체험하여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받은 자 외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마11:27)


생각해 보건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아서 즉 영적인 율법을 마음속으로 따라 살아 보라고 하시는 것을, 육신으로 사무적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따라서 이방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마치 야곱이 형을 만나려고 얍 복강에서 사생결단했다는 것과 같이 이미 마음의 결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 이방 기독교인들은 마음속으로 결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음속으로 결단한다는 것은 이미 나 자신이 사생결단하는 것 즉, 목숨을 내어놓는 일이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앞서 언급, 하였듯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전혀 받지 못하여 죄악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죄악으로 전신에 뭉쳐 있다.


야곱은 자기 본심으로서 곧 인간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 마음은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이기심,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인 인간의 근본 욕망을 말한다. 그러나 야곱이 먼저 에서의 감정을 풀려고 앞서 보냈던 재물, 또한, 그 뒤를 이어 내보낸 여종들과 레아와 라헬은 인간의 생각, 즉 포장되고 위장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이 그리스도 앞에 나가 자기의 본심의 악을 내놓기가 두려우니까 포장된 모습을 내놓으면서 그것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성 있는 죄인의 고백이 아니다. 야곱이 자기가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각가지 방법을 동원하다가 결국은 자기 방법을 다 내려놓고 직접, 에서 앞에 나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즉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 모습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시인할 때 죄를 사해 주실 수 있고, 그 죄에서 깨끗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철저히 자기를 숨기는 것에, 길들어져 있어서 위장하고, 포장하고, 그리스도 앞에 와서까지 자기의 본질을 감추고 자기에게 크게 손상이, 안되는 주변 것들만 꺼내 놓으려 한다.


인간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주인이 바로 자신( 자아, 본질, 죽은 영)이다. 그 자신이 있는 한,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실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원래의 주인으로 오시기까지 그냥 되는 것이 절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을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한다 (히12:4).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자신을 죄인으로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는 자들에게 마음에 천국을 허락하실 것이며, 또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나를 비우고 버릴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것이며, (엡4:13)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앗이 자라서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도록 나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포기하고, 내려놓고 버려야 한다. (마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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