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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 14~17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마귀 종의 신분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본성이 악하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영혼육 모두 타락한 인간은 선과 악을 어느 정도 판단은 할 수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은 전혀 없다. 하지만 지능을 가졌기에 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감추고 겉을 선한 모습으로 포장할 수 있는 교활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른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된다. 동물은 영이 없고 혼과 육만 가지고 오직 본능에 따라 존재하기에 심판을 받지 않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이 땅에서 혼자 살아가기보다는 집단을 구성하여 협력하여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생존 본능이 강하다. 그리하여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 등을 형성하고 그 속에 소속되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사람이 생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착한 사람 또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만약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면 결국 더 큰 불이익이 돌아오고 배척당하여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기적인 속마음을 숨기고 선한 모습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께서 떠난 후에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세상을 살아오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체득했고, 이런 속성들이 유전적으로 또는 교육을 통해 부모로부터 자식이 물려받는다.

 

인간사회에서 서로 적당히 지켜야 할 도리를 정한 것이 바로 도덕이요 윤리이며, 국가에서 서로 지켜야 할 규범을 구체적으로 정한 것이 인간사회의 법이다. 하지만 그 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과 형편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에 걸리지만 않으면 별문제가 안 된다. 대부분 사람은 이러한 도덕과 윤리를 따르고 또한 법을 잘 준수하는 자신을 '선한 자'로 생각하고 있다. 더구나 세상에는 자신보다 훨씬 더 악한 자들이 많으니 그런 자들을 비난하며 자신의 죄악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참고: 여기서 '선한 자'라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정한 개념이고, 하나님 기준으로 보면 선한 인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마귀의 종으로 죄 아래 태어나 죄악을 먹고 마시다가 그 죄로 죽어서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정말로 악하고 더러운 존재에 불과하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이미 하나님께서 선언하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절대로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간 쪽에서 그 죄악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마귀를 멸하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구원해 주실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영들 세계의 위계질서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와 죄악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먼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육체로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시고 따라 살아보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자신을 선하다고 여기는 사고를 깨기 위함이었는데, 어리석게도 유대인들은 그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직 율법만 지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믿었고 또한 자식들을 그렇게 가르치며 이천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하늘나라 선()의 기준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 사회에게 존경받고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신 이후는 모든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오히려 율법을 어겨 몸이 병든 자나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고 그 뒤 성령을 받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증거로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어부, 석수장이와 세리 등 사회적으로 못난 사람들이었는데, 성령을 받아 담대하고 지혜로운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4:13-14]

 

여기서 한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행하는 그 어떤 것도 겉보기에는 좋아도 그 내면에는 자신의 유익과 생존을 위해 행하는 것이지 나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기 위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 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의 의()이다. 만약 유대인이 율법을 잘 지켜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어떠한 선행을 해도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의를 쌓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바울은 이런 자를 향하여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했다.

 

그 증거로 율법을 잘 지키고 선한 삶을 산다고 자부하던 유대인일수록 예수를 믿지 못하고 그를 이단의 괴수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을 섰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강할수록 오히려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율법은 어기고 죄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를 그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을 어긴 유대인들이 결국 변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아들이지만 평범한 한 인간으로 오셔서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아 마귀의 시험도 이기셨고 또한 율법도 모두 지켜내신 예수를 믿고 나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먼저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내셨기에 그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셔서 능력을 주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마귀의 종이 되었지만, 둘째 사람 예수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마귀를 이겨내시고 인간의 구세주가 되셨기에 그를 믿는 자들도 변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 것이다.

 

한편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은 예수 믿고 새사람으로 변했다고 믿고 있다. 그 증거로 예전에 즐겼던 술 담배를 끊은 것을 자랑하고, 주일날 놀러 가지 않고 교회 가는 것을 흐뭇해할 뿐만 아니라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가서 봉사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불신자를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부심이 대단해진다.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이런 모습은 그 마음속이 완전히 변화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타고난 기질이 성령 받아 좀 더 활성화된 것뿐이다. 다시 말해, 남 도와주기를 잘하는 자는 성령 받아 좀 더 열심을 내고, 알뜰살뜰한 사람은 더 검소한 삶을 살게 되며, 지식과 언변이 뛰어난 자는 말씀 전하는 사역을 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의 성경 본문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과연 자신이 그렇게 변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 자가 표본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랬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기독교인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자신의 특성을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특히 그 성품이 좋은 것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 이렇게 좋은 장점을 자진 자들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라 하여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고 자신도 스스로 흐뭇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의()로 결국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기독교인이 성령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결코 자랑이 나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성령 따라 살 것이다. 자신이 예수 믿고 변했다고 생각한다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나오는지 솔직하게 살펴봐야 한다. 만약 한두 개는 하는데 나머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짓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각각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 근거하고 있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와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 어떤 기독교인도 아무리 성령 충만해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 받은 성령은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하실 뿐, 그의 자유의지를 제한시켜 삶을 인도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육으로 오신 예수를 믿고 먼저 그 마음의 죄악을 해결 받은 후 성령을 받았기에 성령 따라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다시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상황이 다 달라졌다. 이방인 앞에 오신 그리스도는 거친 반석으로 오셔서 기독교인의 숨은 죄악을 들춰내시고 그것을 지적하신다. 이때 좋은 성품을 가지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을 위해서 예전보다 더 열심을 내어 일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면 당혹스러워할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을 칭찬해야 하는데 오히려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인의 열심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것이다. 그 증거로 이런 사람은 어떤 하나는 잘 하지만 모든 것은 잘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대부분 기독교인은 지금까지 상상했던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므로 그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이 뻔하다. 마치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 같은 자들이 거부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반면에 가진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어 세상으로부터 멸시당하거나 왕따 당했던 자들은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 그리스도를 만나면 아무것도 잘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더 낙심하고 좌절할 뿐만 아니라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자가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께 나는 죄인이요 하면서 항복하게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다 용서해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자신을 높이는 자에게는 엄한 분이시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다.

 

미천한 자가 그리스도 앞에 나와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가다 보면 놀라운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가시어 그동안 전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도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낮추는 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더 순종하게 되면 조금씩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과거 모습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변하게 해 주신 그리스도께 엄청난 은혜를 느끼게 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여 자기와 같이 못난 자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인 그 누구도 성령 따라 살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조금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도취하여 마치 하나님의 자녀인 양 착각하고 있는 자는 결코 그 어둠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다

 

성령으로 하실 수 없었던 기독교인의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한 사람에게 영으로 오셨고, 인간 속에 역사하고 있는 모든 죄악과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그 뒤를 따르는 자들도 그분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놀랍고도 은혜로운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섭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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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요한

등록일
2023-11-30 19:36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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