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낮 말씀
본문: 요한복음6:41-51
제목: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내게 올 자가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난 자손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 2천년 역사 마지막에 이삭의 예표로 오신 예수를 믿는 자들만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였다. 하지만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뿐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둠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이다.
또 하나 유대인들이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은 믿음이 혈통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였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난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사고 때문에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난 것과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한데 어우러지다보니 그들의 의(義)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던 때라, 아주 보잘 것 없는 시골 촌뜨기인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되지 않아 불가능했던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안식일까지 범하고 다녔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이 더 이상해 보였을 정도이다. 얼마나 예수가 자신들 비위를 거스르고 다녔으면, 예수 믿는 자들을 출교까지 시켜가며 믿지 못하게 하였겠는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출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출교는 곧 예수 믿는 자들을 이방인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벌한 속에서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율법을 거역하여 육체가 병든 자들이다. 과부가 과부 마음을 안다고, 몸이 병들어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육체가 병든 자들 입장에서는 출교를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일단 예수를 찾아가 병든 육체를 낫고 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다. 그들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했던지, 중풍병자는 지붕을 뚫고 내려오기도 하였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부정한 여자라 밖에 돌아다니다 관원들 눈에 띠기라도 하는 날에는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죽음을 무릎 쓰고 예수를 찾아가 고침을 받았다. 세리와 창기들 또한 율법을 거역한 자들이라 유대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던 자들이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죄 사함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을 두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율법을 거역하여 육체가 병든 자들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이 예수를 찾아와 죄 사함을 받은 반면, 육체가 병들지 않았던 자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한 나머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613가지나 되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이 육체가 병들지 않았던 것은 율법의 중한 것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가 병들지 않았던 것뿐이지, 율법의 소소한 것은 그들도 지킬 수가 없다. 그들은 육체가 병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의롭게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유대인들 모두를 아들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육체가 병들지 않았던 자들에게는 도리어 그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모두가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모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야곱의 예표로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 성령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율법은 바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성령의 법’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육체에다 율법을 주시고 그 법을 육체로 지키고 살아야 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다 ‘성령의 법’을 주셨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영적인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영적인 율법이란?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지켜야 한다. 그래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죄악이 가득하다보니, 어느 누구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 마음이 부패하여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무조건 성령만 받으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의 뜻대로 살아야 구원에 이르게 될 터인데, 성령의 뜻대로 살지도 못해놓고는 모두가 구원 받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믿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의 뜻 또한 아들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성령의 뜻이다.
기독교인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이방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이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를 ‘성령의 법(영적인 율법)’아래 가두어 놓기 위해서다. 그래야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께서, 기독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통해 다시 오셨을 때, 그를 믿고 나오는 자들을 성령을 거역한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무조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만 받으면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구원이라고 말하니까 그것을 흉내 내어 자신들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인 율법’으로 의인이 되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영적인 율법’ 또한 기독교인들의 죄를 깨닫게 할뿐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영적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자가 없다. 따라서 아직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른 자가 없다. 다만 예외로 둘 것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자들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았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책임지신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어둠속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 이름만 부르면 무조건 자신의 죄가 도말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대인들의 구원을 흉내 내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도 곧장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받은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영적인 율법’ 역할을 할뿐 이방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에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여 이방인들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것이라서 곧장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달리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곧장 구원에 이를 수가 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의 실체를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의 실체를 믿은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다.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것과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것에는 차이가 많다. 이스라엘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의 효력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지은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 누구에게나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다. 이방인들도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성령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실체로 오신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율법아래서 살아오던 자신의 모든 삶을 모두 포기해야만 예수를 믿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율법아래서 살았던 자신의 모든 삶을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두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이 가능하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은 것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이 가능한데, 이것을 어찌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기독교인들도 진짜 자신의 ‘믿음’을 선보이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통해 다시 오셨을 때, 지금까지 자신이 성령의 법아래서 살아왔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그를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의 마음속에 직접 들어가시게 된다(성령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믿는 자의 마음속에서 지금까지 죄를 짓게 하고,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게 방해하던 모든 ‘악한 영’들을 쫓아내시고 믿는 자의 주인으로 좌정하시게 된다. 이런 자는 다시는 손으로 지은 예배당에 나아가 예배드리지 않아도 된다. 더 나아가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아도 된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속에 주인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이런 자는 그리스도가 선생이 되어 자신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것이다.
기독교인들 모두가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착각에 빠져 좀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인(義人)이라서 예수를 믿지 않던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잘못된 사고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런 자들 앞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기독교인들이 믿겠는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도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 역시 아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실 텐데, 어느 누가 그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낸 사자로 여기겠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공중에 재림할 예수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시골 촌뜨기가 나타나 자신을 믿어야 성령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자, 모두들 또 하나의 가짜 예수가 나타났다며 아예 상종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도 유대인들로부터 이런 오해를 받았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율법아래 살던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 역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주일날이 따로 없이 어디서나 말씀을 전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도리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더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단들에게 시달려왔는데 또다시 새로운 이단이 나타났다고 여길 테니까 기독교인들 눈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눈엣 가시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이 아무리 철의 장막을 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못 믿게 하여도 이런 자들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성령을 거역하여 마음이 병든 자들이다. 홀아비가 홀아비 사정을 안다고, 마음이 병들어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병든 자들 입장에서는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그리스도를 찾아가 자신의 병든 마음을 고침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자신들은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경우를 두고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25).
결국 성령을 거역하여 마음이 병든 자들과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이 그리스도를 찾아와 죄 사함을 받은 반면, 마음이 병들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자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한 나머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의인이 아니다. 다만, 그들 속에 있는 마음이 병이 밖으로 들어나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는 아직도 악독이 가득하다. 그러함에도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깨닫지 못하여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율법’을 주신 목적이 기독교인 모두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마음이 병들지 않았던 자들에게는 도리어 그것이 걸림돌로 작용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지금까지 성령의 법아래서 살게 하신 목적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결국 기독교인들도 “성령(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앞으로 올 수 없게 된다”고 하신 말씀이 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