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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삼위일체의 참뜻

삼위일체의 참뜻

요한복음 14:8~11

 

기독교의 근본이자 모든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믿음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로 보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하나로 보는 목적은 예수의 신성을 밝혀 그가 인간을 초월한 으로 모셔 믿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이것이 주목적이 되어, 더 많은 신자들, 더 많은 사람대상으로 포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론을 기술하며, 여러 공의회를 거쳐 정설이 되고, 기본교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에서 가장 큰 오류가 범해지고 있는 걸 기독교인들은 모를 것이다.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범주 안에서 하나인 것은 맞으나, 각각 위격이 다르고 하시는 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께서는 전체적으로 하나님(or)으로 불리며 마귀의 심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구원이 주된 목적이시다. 그러나 하시는 일이 각각 다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세상만물과 모든 것에 하나님 즉, 불신자들도 불리는 초월적 존재인  이시다. 그렇기에 세계와 시간, 창조와 종말, 탄생과 죽음은 오직 아버지께서 관장하신다.

 

그 예로 불신자들이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한다. 이것은 ( 18:5)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로 이해하면 된다. 그들이 옳고 그 기도가 정당해서 들어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간절함이 하나님에게 닿아 어쩔 수 없이 들어준 것이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귀찮아서, 혹은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다는 것에 반감을 살수도 있지만, 이는 인간의 오만함과,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당신의 아들을 믿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는 정말 죽을 것만큼 간절해야 겨우 하나님께 닿아 그것도 겨우 들어주는 셈인 것이다.

 

두 번째 성령께서는 믿는 자 들의 하나님이다. ‘성령은 말 그대로 아버지의 영이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자 불신자들이 지천에 만연해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그리고 그분이 가진 뜻을 알 수는 없다. 성령이 우리 영을 지배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울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써 우리의 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배해주신다. 본디 예수께서 피 흘리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은 마귀의 관할이었다. 그러나 죄 없는 피로써 대속하여, 우리의 영을 구원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 여긴다는 것에서 엄청난 오류가 생겨버린다. 어떤 자는 성령을 받은 것이 성화가 되어 완전한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자는 성령을 받은 것이 우리의 혼까지도 완벽하게 정화가 되어 성경말씀보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면 나중에 자동으로 성화가 된다는 사람, 그리고 죽을 때 나머지 잔 죄들은 예수께서 모두 사해주신다는 여러 가지 구원론을 펼치고 있다.

 

이렇게 구원론이 여러 가지인 이유는 정말 그리스도가 기독교인의 주인이 되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생각이 다르고 기준이 다르고, 가치도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자 그리스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올바른 것일까? 성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아들의 역할로써 아버지와 스스로 위격을 두고 계신다. 만일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였고 하나의 위격을 가졌다면 굳이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 하시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도 아들로 보내시지 않았다.

 

위계질서는 하늘나라에서 모든 근간을 이루는 철저한 법과도 같다. 루시퍼가 왜 타락을 했을까? 바로 하늘나라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혀, 추방된 것이다. 하나님이 위계질서를 어긴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지 못할뿐더러, 세상만물 가운데도 위계질서를 두셨다. 그 예가 바로 가정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우두머리로써 책임과 법 가정을 이끄는 역할이 있고, 어머니는 자식들과 가정을 잘 보호하며, 가정의 법안에서 자식들이 아버지말씀을 잘 들을 수 있도록 타이르고 훈육하는 역할이 있다. 그리고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산물로써 아버지의 법과 어머니의 훈육으로 성장하여 또 다른 가정을 이루는 잠재적 목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정에 위계질서로 만들어 놓으신 이유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 자극적인 욕망과 본능을 쫒다보니 이러한 위계질서가 전부 무너져 각자의 역할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점점 더 찾기 힘들어진다.

 

하나님나라 위계질서 또한 이 가정과 같다.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 만물과 하늘나라의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고 위계질서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법을 만드셨다. 그리고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로써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식들이 잘 따를 수 있도록 훈육하고, 보호하며 잘못을 했더라도 깨닫게 하여, 아버지에게 나아가 잘못을 빌 수 있도록 하신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중보자이시지 예수께서 법을 주관하고 창조와 종말을 주관하는 하나의 신처럼 불리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개념은 그를 신으로 받들어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내가 하나님을 따라가기 위해 나를 통제해주실 분으로써의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안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는 말은 너희가 추측하는 하나님을 떠올리지 말고, 내가 말하고 행하는데서 아버지를 찾아라! 라는 뜻이다. 즉 나 이외에는 하나님아버지의 참의미나, 참뜻을 아는 자는 없으니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따르라는 뜻이었다. 근데 이것이 이방인들 손에서는 마치 예수가 하나님, 하나님이 예수인거마냥 혼합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성령을 하나로 보면 아버지를 중보자로보고, 아들을 창조주로 보게 되는 엄청난 오류가 일어난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역할은 오직 자식(믿는 자)을 아버지를 온전히 따라 살 수 있게끔 하기 위한, 나의 어머니와도 같은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에 논리에도 사용하여보자면, 자식이 아버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자식스스로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자식을 훈육하여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여 올바른 길로 들어 설수 있게 하는 게 그리스도의 역할이다.

 

즉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든 길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리자신은 그것을 인지 못하고 의로워 진다. 그런데 그 어긋난 길에서 되돌려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신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주지 못하니 어긋난 길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계속 구원받았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럼 성령은 가정에서 무슨 역할인가?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성령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아버지를 알게 하는 이다.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구원이 아니었다.

 

바로 메시아인 예수께서 오셔서 원죄를 해결해 주시고, 그를 믿어야지만 완전한 구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하나님의 참 아들인 예수를 믿지 못했을까? 그 당시 율법으로 행위로 의로워져 믿지 않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정확히는 몰랐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백성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받아 살았지만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시기전까지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세운 선지자들 빼고는 백성 중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흘린 피로써, 휘장이 찢어지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 중 예수를 믿었던 자들은 성령을 받았고, 그제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즉 성령(아버지 영)을 받고 진짜 하나님을 뜻을 아니 내가 믿고 따랐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자신의 존재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중재자가 제대로 알려주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는 것은 추측이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우리는 유대인과 달리 예수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령을 받은 증거는 딱히 은사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써 온 세상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한다면 성령은 값없이 와주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은 다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달리 하나님의 백성된 적이 없다. 즉 선택받아 율법을 받고, 정해지고 통제된 삶은 산적이 없기 때문에 각기 다른 생각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이방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그제야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다. 율법이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면 성경과 교회의 법들이 성령의법이 되어 그제야 통제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을 받고 성화가 아닌 백성이 되어 이제야 백성의 삶을 시작하며, 성령의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또한 율법을 따라 온전히 살 수 없었듯이 우리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의 법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있을까? 단연코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땅에 바리세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지켰지만, 그것을 우회적으로 돌려 지키거나 마음도 없이 형식적으로 지키고 스스로 의로워져 예수께서 오셨을 때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반면 율법을 어겨 병들고 소외받은 자들은 예수께로 나왔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율법을 행위로 지켜 의롭게 된 자들 보다. 지키지 못해 죄인이 된 자들을 구원하셨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알고 계신다. 우리 이방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고 있으며, 성령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욕망과 충돌하며 성령을 따라 사는데 큰 걸림돌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받았다고 의롭게 생각하는 자들은 이 충돌이 없는 것 마냥 행동한다. 자신의 문제를 덮고 쉬쉬하며, 의로운 것만 내세우겠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이 충돌에 대해 괴로워하고, 자신이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없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한 번 더 도적같이 오셨다.

 

바로 으로 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참뜻을 알자가 없으며, 아버지를 따라 온전하게 살 수도 없다. 더구나 우리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자아(죽은 영)가 생각하는 개념이나 방향, 가치관이 각각 전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고 성경을 이런 방향 저런 방향으로 해석하지만 전부 다르다. 결국 교리라는 것으로 타협하여 해결을 보는데 그마져도 해결이 안 되어 여러 종파로 나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나뉠 수 없으며, 모두 하나로 만드신다. 바로 죄인으로 말이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성령을 받아 구원을 받았으니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인줄 착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흘린 피로써 성령을 받아 은 하나님께 속하여 백성이 되었으나 우리  마음은 아직 내 자신(죽은 영)이 주인이다. 쉽게 말해 건물은 하나님건물인데, 속 인테리어는 마귀의 인테리어 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 인테리어마저 하나님 것으로 바뀌려면 내속의 주인을 몰아내고 그리스도 이 나의 주인이 되어주셔야 영과 혼(마음)이 온전히 하나님 것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살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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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요셉

등록일
2023-12-0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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