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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 하는 자!

사무엘하 12 1-15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 하는 자!

 

삼하 12 1-15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시켜 범죄한 다윗왕에게 가난한자와 부자의 예화로 다윗왕에게 죄를 깨닫게하신 이야기다.

 

오늘날 자신이 선지자 나단 처럼 자신의 죄를 직접적으로 들췄을 때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대중 앞에서 자기의 잘못이 떠벌려졌을 때 그 자리에서 맞다고 쉽게 시인을 할까?

 

어느 누군가는 자신은 죄를 지적하면 시인한다고 하지만, 과연 죄에 대한 지적이 나단처럼 직설적이고 공격적일 때 죄를 쉽게 시인 할 수 있을까? 직설적으로 지적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죄를 부인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부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우리속에 자신이 죽는 것(자아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아(죽은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자아라는 것은 곧 내 삶을 이끄는 나의 중심이다.

 

자아는 항상 구축해오던 사회적 이미지와 나의 신념이 지켜지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한다. 그렇기에 자아(죽은영)는 항상 나에게 유익되는 것을 전제로 수용과 거부를 한다. 자기에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수용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거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을 인정한다는 표현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멋지게 여기고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칭찬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일까? 본심은 최대한 자기에게 피해가 안가는 방향으로 작은 잘못들은 제물로써 인정하고, 큰 것들은 마음속에 숨겨두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모습이다.

 

위에서 언급한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지적에 초점을 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아는 은밀하고 수용 가능한 지적은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은밀하고 조심스럽기에 나의 감정이나, 나의 이미지의 손상, 그리고 지적한 사람과의 어느정도 타협을 이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아는 모든 것을 자기가 유리한대로 이끌고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아 ,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더라도 그 주인이 나 자신이어서 그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성령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고,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하여, 자기합리화를 시키는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 판(선한 것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보호해주셨다. 그러나 율법을 어기면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귀신에게 붙들려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후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을 어긴 죄를 예수님의 육체로 대신 갚아주시고 귀신을 떠나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다르다. 우리는 율법 아래 살지 않았고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마음판이 악하고, 시대가 지날수록 문화의 지배를 받고 살았기에 우리의 마음 판은 나의 자아와 모든 나의 유익에 맞춰져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피로써 원죄를 사해주셨다고 해도, 그 마음 판의 주인이 나의 자아이기 때문에, 성령이 감화감동을 주신다고 해도, 일시적이고 오래 못갈뿐더러, 성령의 말씀을 거역해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다윗왕이 나단에게 직접적으로 지적을 받았을 때, 유대인으로써 하나님이 그 마음 판을 보호하셨기에 마음 판이 죄로 물들지 않아 자신의 죄를 그 자리에서 쉽게 인정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우리 자아에 휩싸여,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생사람을 잡는다며 반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예수께서 피흘려 주시기 전까지는 모두 율법 아래 매여있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마귀의 자식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들은 예수께서 피 흘려주심과 동시에 예수님의 이름을 믿은 사람들은 마음 판에서 죄가 씻기어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에초에 마음 판의 주인이 나 자신인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예수의 피 흘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죄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온전히 성령을 따라 살 수 없게 되고, 모두 성령의 법을 어긴 죄인으로써, 모든 마음판이 선한 것을 향하는 것이 아닌, 자아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즉 하나님 아들이 아닌 하나님 백성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해결 받기 위해서는 우리를 성령을 어긴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의 마음 판을 새롭게 해주실분이 있어야 한다.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육체로 계실 때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실 수없기 때문에 부활의 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던 예수께서 부활의 영으로 사도바울에게 임하였듯이, 우리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오셔야 기독교인들은 비로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러기 전에는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빛을 비춰주실 때,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사람만이 자기 속에도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도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나의 죄를 지적하였을 때, 위에서 언급한 내용대로 반박하고 대적하였다. 나는 옳게 살려고하는데, 왜 나를 매도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낱낱히 나의 이중성을 들춰 내주셨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죽을 것 같이 괴롭고 부끄러웠지만, 너무나도 맞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날선 검과도 같아서, 예리한 칼로 나의 정곡으로 찌르는 말씀에, 결국 내가 못느끼고 있을 뿐이지, 나라는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내 자아를 섬기고 있었구나.” 라는걸 느꼈다.

 

그 뒤로 나의 모든 것을 반납하고 내가 나 자신을 믿는 것 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을 지적해주시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시인하다 보니 나에게도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져, 내가 얼마나 죄인 중에 괴수인가를 알게 되어, 그리스도 앞에 저절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주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삶이 정말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나를 주장 할 수 없는 삶이 불행하고, 족쇄 같을 줄 알았으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상 빛으로 깨닫게 하셔서 더욱더 나를 죄인이 되게 하시고, 내가 항상 바라던 약자들을 진심으로 생각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내 유익을 찾기 위해서 하이에나처럼 눈에 불을 키고 노력하던 무거운 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셨다.

 

사람은 자기가 아닌 것이 되버리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주장이나, 신념, 생각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남을 짓밟고, 모든 것이 유익이 아니면 받지 않는 나의 이기적인 모습에서, 나를 상대방에게 내어주고 배려하고, 희생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주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참된 아들로써 그들에게 나를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시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빛이 나의 자아를 비춰 올 때,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나의 죽게 된 모습을 보고 주님이 새롭게 해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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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요셉

등록일
2023-11-05 21:0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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