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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야곱의 본질을 내 놓으라

야곱의 본질을 내 놓으라

창세기33:1-20

 

인간은 모두가 다 악에 물든 존재이다. 인간이 죄악에 물든 존재라는 것은 이미 아담이 범죄한 원죄를 이어받고 태어나 죽은 영이 주인이 되어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인 것이다.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도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선이기 때문에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다 죄로 말미암아 어둠속에 있기 때문에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의 기준으로 그리스도를 인간들 앞에 보내주신다.

 

유대인에게는 예수가 육체를 입고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 때문에 예수를 보고도 믿지 않으면 죄가 되고 심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우리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영으로 사람 속에 오셨다. 그래서 그 속에서 나오는 말씀이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심판의 근거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법, 곧 율법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심판의 근거는 영적인 율법인 성령의 법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름으로 성령을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된 사람들이다. 하나님 백성이 되는 순간 법이 주어지게 되는데 우리 이방인인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영적인 율법이 주어진다. 그것은 마음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이 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인들을 심판하는 근거는 바로 성령의 법, 즉 성령을 따라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살고 있을 때는 인간으로서는 온전히 지킬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에 심판 아래 놓여 있었다. 즉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통로로 예수를 보내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율법을 범한 죄를 사해 주심으로 구원에 들어가게 하셨다.

 

우리 이방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 백성의 신분이며 성령의 법을 따라 살지 못함으로 심판 아래 놓여있다. 즉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의 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자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 이름을 부름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의 피의 효력으로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예수 이름에는 마귀를 멸하고 원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이다.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를 아직 사함 받지 못해 여전히 죽은 영이 주인이 되어 인간의 마음을 붙잡고 조종하고 있다. 이것을 해결해 주시고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방 기독교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사람을 통해 와 계신다.

 

그리스도는 산영이고 인간은 죽은 영이다.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으로서 살리기 위해 우리 죄악을 지적하시게 된다. 한 마디로 우리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으로 인정하느냐 안하느냐를 확인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그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게 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진정 죄인인가를 알기 위해 그 죄악을 내 놓으라고 하신다. 성령을 거역하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인간의 죄악된 본질을 꺼내놓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자기 죄를 꺼내 놓고 시인한다는 것은 곧 선 앞에서 죄인으로 항복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비로소 그리스도로부터 긍휼하심을 입고 죄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죄사함의 증거는 죽은 영이 떠나고 그리스도가 속에 들어와 주인이 되심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자기 죄악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 속에는 자기를 지키려 하고 자기의 추한 모습을 숨기려는 본능이 들어있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이 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습득하여 자기가 속해있는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기의 추한 모습은 숨기고 겉으로 좋은 모습을 위장하여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지켜내고 보호한다.

 

인간은 이렇듯 철저히 자기를 위장하여 자기의 악한 본질을 깊이 숨겨놓고 선한 척으로 겹겹이 자기를 포장하여 자기가 아닌 다른 모습, 즉 거짓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다. 이 룰을 벗어나면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서 서로서로 자기의 잇속을 챙기고 자기 유익을 계산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가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 속 가장 깊이 감추어둔 그 추한 모습을 내놓으라고 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우리가 고백해야 될 죄는 바로 인간의 본질의 죄, 즉 죽은 영의 형태를 내 놓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 모습을 내 놓으라고 하시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시인해야만 죄를 사해 주실 수가 있고 그 죄에서 깨끗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철저히 자기를 숨기는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리스도 앞에 와서까지 자기의 본질을 감추고 자기에게 크게 손상이 안되는 주변의 것들만 꺼내놓으려 한다.

 

창세기32장과 33장을 보면 야곱이 자기 형 에서가 400인을 레리고 자기를 죽이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머리를 써서 대응하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다. 야곱이 심히 두려워서 자기가 직접 형 에서에게 나가는 것을 회피하고 계속 다른 방법을 쓰려고 한다.

먼저 자기 소유 중에서 예물을 택하여 종들에게 맡겨 앞서 보내서 형의 감정을 풀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가속들을 전부 먼저 보내고 자신은 두려워 뒤에 남아서 기도하다가 천사를 만나 밤새 씨름하여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낸다.

 

그리고는 막상 에서가 눈앞에 이르게 되자 야곱은 두 여종, 실바와 빌하를 앞에 세우고 그다음에 레아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라헬을 맨 뒤에 세우고 내보내려고 하다가 결국 자신의 방법을 포기하고 전날 밤 하나님께 기도하고 축복을 받아낸 그 힘으로 자기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직접 에서 앞에 나가 무릎 꿇음으로 자기의 과오를 인정하고 나갔을 때 에서의 마음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은 우리 이방인의 예표로서 끈질긴 기질 뿐 아니라 전형적인 이방인의 교활함과 철저히 계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자기 본심으로서 곧 인간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 마음은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이기심,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인 인간의 근본 욕망을 말한다. 그리고 야곱이 먼저 에서의 감정을 풀려고 앞서 보냈던 재물,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내 보낸 여종들과 레아와 라헬은 인간의 생각, 즉 포장되고 위장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그리스도 앞에 나가 자기의 본심의 악을 내 놓기가 두려우니까 포장된 모습을 내놓으면서 그것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성 있는 죄인의 고백이 아니다. 야곱이 자기가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다가 결국은 자기 방법을 다 내려놓고 직접 에서 앞에 나가 무릎 꿇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자기 싸움에서 이기고 자신을 죄인으로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리는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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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나다나엘

등록일
2023-12-01 07:07
조회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