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누가복음5:36-39
제목: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5:37-38)말씀하시고 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는, 율법아래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영생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2천년 동안 묵은 포도주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까 새 포도주를 마시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묵은 포도주에 취해서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깨닫게 하시려고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지만,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유대인들로서는 전혀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어둠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는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겉(율법)으로 열심을 내는 것을 가지고 선과 악의 기준을 삼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당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던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기준이 되어 자신들과 생각이 맞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요. 자신들과 뜻이 맞으면 옳은 것이라 여겼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자들 앞에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그들은 단번에 예수와 대립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이는 사단이 인간의 주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짐승같은 자들로서 잡혀 죽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 앞에 예수를 보내주신 것은, 율법으로는 유대인들이 온전케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보내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도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모르다보니까 끝까지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모르다보니까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착각에 빠져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히브리서 8장7절을 보면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첫 것으로 주신 율법이 유대인들을 온전케 할 것 같았으면 둘째 것 즉, 예수가 오실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를 모르고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러 오신 예수를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첫 것(율법)만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런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율법아래서는 절대 이런 사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려면, 반드시 아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어둠속에 살고 있는 인간 스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 수가 없다.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자가 하나님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속성(구원섭리)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는 그만큼 사람 속을 알 수 없다고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했더라도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인간 스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빛 되신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수 있었고,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다. 아직도 죄 아래 살고 있는 자가 구원 받았다고 믿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어볼 것도 없이 멸망으로 가게 된다. 이런 자들 앞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마도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로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묵은 포도주에 길들여져 있다보니 새 포도주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묵기독교인들 또한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에게 새 술은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요. 그리고 묵은 포도주는 현제 성령의 법아래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새 술로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2천년 동안 낡은 가죽 부대 안에 갇혀 살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몸에 배어서 도리어 낡은 가죽부대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살다보니 여기서 벗어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곧 자기 자신(죄악)을 사랑하기 때문에 빛 앞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낡은 가죽부대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얻었을까? 한마디로 사단의 백성에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전부이다. 다시말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기독교인들의 영(靈)이 마귀 발아래서 나온 것 이 전부이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이 겉만 약간 달라졌을 뿐 속사람은 아직도 그대로 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말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죄악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아 겉만 번지르르 할 뿐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성령만 받으면 무조건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다보니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지만 마음속이 달라지지 않다보니, 입술로만 하나님 이름만 부르고 있을 뿐, 실상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만 보면 손가락질 하며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왜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불신자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나님 아들인 예수와 같은 행동들을 왜 우리에게 보여주지 못하냐는 것이다. 불신자들로서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렇게 항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로서는 세상 사람들의 항변에 누구도 수긍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들(예수)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로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비아냥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가면 갈수록 타락의 극치를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가면 갈수록 부패가 심해져서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1절을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말하고 있다. 이 말을 해석하면,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날마다 드리는 제사로는 유대인들이 온전케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다 ‘영적인 율법’을 주셨다. 하지만, 이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매주 예배당에 나가서 드리는 예배로는 결코 기독교인들이 온전케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로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없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예배를 통해서는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온전케 될 수 없다고 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온전케 될 수 없기 때문에, 유대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예수가 오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어야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온전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으로는 마음속의 죄까지 해결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 2천년 역사 마지막에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리스도를 믿어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마음속의 죄를 해결 받고 온전케 될 수 있다.
그토록 율법에 열심을 냈던 유대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함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에 나가서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만 인간들을 상대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 또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첫 것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지만, 성령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온전케 될 수 없기 때문에, 둘째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미 이런 계획을 세우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제 기독교인들 앞에도 둘째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게 되었다. 기독교가 버티고 있게 되면 도리어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예수가 오셨을 때 에루살렘 성전을 파괴시켰던 이유가 유대인들 모두가 예수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예수가 구세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이 오늘날까지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에 나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앞에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다시 오셨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예배당에 나가서 재림할 예수를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런 자들은 이 세상이 다 망해가도 그들은 계속해서 공중에 재림할 예수만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재림할 예수를 손꼽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공중 재림에 앞서서 이 땅에 도적같이 오셔서,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알곡으로 인(印)치는 작업을 먼저 하시게 된다. 그런 다음 세상 마지막 날 공중에 재림하셔서 땅에서 알곡으로 인(印)친 자들을 먼저 공중으로 불러 올라가게 된다. 그럼 이 땅에는 예수 이름만 부르고 있던 쭉정이들과 믿지 않던 불신자들만 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믿지 않던 그들에게 하늘에서 진노의 잔(불비)을 쏟아 붙게 될 것이다. 이때가 바로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하는 시기이다.
한 나라의 국가나 사회도 끊임없는 변화와 개혁을 단행해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고인 물은 썩어가기 마련이나 흐르는 물은 절대 썩지 않는다. 기독교도 이제 더 이상 옛 구습에 발목이 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옛 구습은 도리어 부패만 더해갈 뿐이다. 이제는 옛 구습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에 동참해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새 포도주도 버리지 않고 묵은 포도주도 함께 보존 될 수 있다. 이는 성령의 법아래 살던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께 살수 있다는 말이다.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가 인간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주셨듯이,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주셔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 날 예수 부활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새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될 것이나, 묵은 포도주에 취해 있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