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로마서9:30-33
제목: 거친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규례에 따라 태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데, 할례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 백성임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세상과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여 유대인들은 태어나자마자 율법의 보호를 받고 자라는 것이다. 율법의 보호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법대로만 살면 죄가 유대인들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점이 이방인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들이라, 그들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 둘씩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라고 하는 말은, 유대인들 마음은 율법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죄가 침범하지 못하더라도, 유대인들 영(靈)은 아직 예수가 오셔서 피흘려주시기 전이라,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가 오셔서 피흘려주시기 전에는, 세상 임금으로서 인간의 영(靈)을 자기 발아래 놓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모세가 그토록 큰일을 하였지만,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 집에서 사환으로 일했다고 하는 말은 바로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사용하셨지만, 모세의 영(靈)이 마귀 발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종이라 부르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서 율법의 중한 법을 어긴 자는 죽음에 이르게 되고, 그렇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형벌로 육체가 병이 들기도 한다. 하나님 법에는 용서가 없기 때문에, 법을 어긴 자는 반드시 죄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2천년 역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율법을 거역한 자들이 너무 많다보니,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아 육체가 병든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얼마나 그 숫자가 많던지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로마의 장군 하나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병든 자들이 많냐며 반문했다고 한다.
율법아래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를 사람의 모양으로 인간들 앞에 보내주셨다. 예수가 육체를 입고 오신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의 ‘자범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마귀를 멸하고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다. 아담이 지은 원죄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마귀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지은 죄이다. 아담이 지은 ‘원죄’는 오직 예수의 피를 통해서만 해결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은 예수를 통해 율법을 거역한 ‘자범죄’를 먼저 해결 받은 다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를 통해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게 되면, 마지막에 성령을 받고 비로소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아래서 성장해온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태어나자마자 율법의 보호를 받고 자라게 되지만, 이방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악 속에서 태어나서,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있기 때문에 날마다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 출발부터가 이방인들은 유대인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다. 서두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다른 점을 눈여겨보라고 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아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 어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죄악 속에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미 수천 년 전에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
그 첫 번째 계획이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흘려주신 피로 말미암아 세상 임금인 마귀를 멸하고,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먼저 보내주신 것이다. 아무리 험악하게 살던 이방인이라도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어떤 댓가나 노력이 없이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이때 이방인들이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이방인들은 성령 받은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는,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방인들의 영(靈)이 이제 겨우 마귀 발아래서 나와서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들도 비로소 성령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이제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자기 생각대로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처음 성령을 받았을 때는 자기 눈이라도 빼줄 것처럼 또는 자신의 전 재산이라도 다 바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이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 때문이다. 아직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는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성령 받은 것으로는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가? 그 이야기는 아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 마귀 발아래서 나왔지만, 태어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난 이방인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도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해결이 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성령은 하나님 영이라서 인간의 육체를 입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도 이방인들 마음속에는 죄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데, 구원 받았다는 사람들이 왜 자꾸만 타락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는 바로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이 자신을 세상으로 자꾸 끌고 가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서 모두가 타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계획도 이미 수천 년 전에 세우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던 당신의 아들을 다시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것이다. 아들을 보내서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는 이제 그리스도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이방인들 앞에 다시 오실 때는 부득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 한사람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영은 사람의 몸을 입어야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역시 부득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사도 바울 마음속에 들어가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았던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중에서 한 사람을 통해서 오시는 이유는, 이방인들의 형편사정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다. 만약 유대인을 통해서 오신다면 율법의 보호를 받고 살던 자가 어떻게 이방인들의 형편사정(죄악을 먹고 마시는 과정)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방인들 속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서 오시면, 그가 누구보다도 이방인들의 형편사정을 잘 알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형편사정을 알아야 그들을 하나님 앞에 긍휼이 여겨달라고 중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방인들 앞에 오시게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시게 된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돌로 오셨지만, 이방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낱낱이 지적하기 때문에 거친 반석으로 오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돌로 비유하는 것은 돌은 단단함과 세상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돌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돌이라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의 죄만 사해주면 되기 때문에 유연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오시지만, 이방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는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지적해야 되기 때문에 말이 거칠고 행동 또한 거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친 반석은 다듬지 않은 돌이라서 날카롭기 때문에 인간의 폐부를 찌르는 말씀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지적하게 될 때, 그것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사해주시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지적하는데, 이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상실한 마음(악한 마음)을 그대로 놓아두게 된다. 그런 자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자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쭉정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자들은 세상 마지막 날 예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공중으로 들림 받지 못하고, 이 세상에 버려져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우쭐되고 있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우쭐되던 것과 같다. 유대인이 되었던 기독교인이 되었던, 인간에게는 두 가지 죄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죄를 모두 해결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첫 번째 죄는 아담이 지은 ‘원죄’가 있고, 두 번째 죄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지은 ‘자범죄’가 있다. 첫 번째 아담이 지은 ‘원죄’는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를 마셔야 해결 받을 수 있고, 두 번째 자신이 마음속으로 지은 ‘자범죄’는 예수 살을 먹어야 해결 받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아래 살던 자들이라, 예수 이름만 불러도 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를 통해 아담이 지은 ‘원죄’를 사함 받게 된다. 원죄를 사함 받게 되면 마귀 발아래서 나왔다는 증거로 마지막에 ‘성령’을 받게 된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두 가지 죄(자범죄와 원죄)를 모두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도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던 죄가 해결 되지 않기 때문에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은 예수 피를 마시고 아담이 지은 ‘원죄’ 한 가지는 해결되었지만,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자범죄’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아직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자범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득불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지적할 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사함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상실한 마음(악한 마음) 그대로 놓아두게 되기 때문에 땅에서 쭉정이로 버림받게 되는 것이다. 쭉정이는 세상 마지막 날 불속에 던져지고 말게 된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기독교인들은 마음속 깊이 새겨 들어야 한다. 만약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신 것으로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이 완성될 것 같았으면, 굳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겠다고 하는 이사야서 28:16절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한분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완성 될 것 같았으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하나로 족할 것이지 굳이 이삭의 아들로 야곱을 또다시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하나님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되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성경은 수천 년 전에 예고하고 있다.
성경에 이런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도 어둠속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아브라함 아들로 이삭을 주시고 또 다시 이삭의 아들로 야곱을 주신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깊은 뜻은 오직 하나님 품속에서 나온 아들만 알 수 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 기독교인들은 ‘양자의 영(그리스도 영)’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 하늘나라 비밀들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때는 알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일들을 모두 이루어 가고 계신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하나님의 콧김만도 못한 것이 인간의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는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느낄지 몰라도, 하나님 쪽에서 보면 바람에 날리는 겨만도 못하다. 그런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계획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를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가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는가? -귀 있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