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차이
요한복음 3:16-21
위 구절인 16절과 19절을 보면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에 대해 예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자들이 어둠으로 가는 자들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빛이고 세상은 어둠이다. 단순히 이 논리로써 세상으로 향하면 어둠으로 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지킨다면 빛으로 다가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간속의 악은 그리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으로 열심을 내어 결국 내 이익과 유익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열심이 옳은 신앙인 것 마냥, 마치 예수님을 위해 열심을 낸 것처럼 뿌듯하게 여겨 자신이 옳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죽은 영(자아)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죽은 영(자아)라는 존재는 항상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숨긴 채 그것이 정당하고, 선하고, 옳은 것처럼 포장을 하여 자신이 나아가는 길은 옳은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최대한 선한 이미지를 지키며 유익을 얻어내는 것이 우리 이방인의 살아가는 방식이다.
여기서 이방인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동일시하며 같은 신앙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믿음의 형태를 그대로 행하면 될 줄 알고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아래서 2천년 넘게 살아온 백성이다. 문화와 법, 모든 구조가 하나님이 정해준대로 사는 민족이다. 그래서 믿는 방법부터, 죄를 지으면 받게 되는 형벌의 가지, 개수, 등 모든 것이 규격화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율법은 유대인들 삶 곳곳에 관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만 지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면 하나님께 긍휼함을 입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율법으로부터 보호받았다고 표현한다. 율법의 보호를 받은 유대인들의 마음 판은 이방인들과 다르게 나 자신을 의지하는 살아가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의지하는 쪽으로 형성이 되어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방문화가 유대인들에게도 스며들게 되었다. 그래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점차 이방세계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 또한 다른 문화권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비교하면서 점차 삶의 목표에서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우선순위에 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형식적으로나 편법적으로 율법을 지키고 마음은 하나님께서 멀어진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악이 관영해지면서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스라엘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어겼고, 하나님과 멀어져있다는 사실을 알며, 자신의 죄의 무게를 괴로워하는 자들을 구원하셨다.
이러한 구조가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구분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유대인들 같은 구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없이 수천 년을 살아왔으며, 우리자신이 세상을 상대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관의 1순위는 항상 우리 자신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가치관의 1순위였지만, 이방문화에 의해 타락한 케이스다. 하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누군가를 위해 살다간 자신의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항상 가치관의 1순위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성령의 감화 감동도 약해지고 결국 다시 불신자와 같은 생활 일 때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 수 없는 구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다고 한들 내 마음속 부동의 1위는 항상 나 자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성령을 따라 살수 없으며, 성령을 따라 산다고 하는 자신의 모든 행위나 열심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것임에도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방인들(전 세계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여 영이 되시어 그리스도 영으로 우리 이방인들에게 오셨다. 그리스도 영은 우리 이방인의 마음속에 죽은 영(나의 자아)을 몰아내고 나의 주인이 되어주신다. 나의 주인이 되어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이방인들은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이방인들은 무엇인가 안정되고 보장되어야지만, 마음이가는 족속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마음을 준다는 것은 전부 계산적인 것이며, 그 다음 유익을 생각해서 미리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내 마음속에 오셔서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마치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모든 것을 규격화하고 일거수일투족 간섭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도 그와 같이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을 알려주시고,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팩트 있게 알려주신다.
그렇지만 유대인들과 같이 규격화는 시키지 않으신다. 우리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이유를 알고 그것이 타당해야지 움직인다. 즉 의심이 많은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는 인격적으로, 개개인으로 오셔 나에게 타당한 이유와 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지 체험과 행동 그리고 능력과 역사로 의심하지 못하게끔 알려주신다.
하지만 이스라엘 땅에 예수께서 율법어긴 백성들 중 자신의 죄의 무게를 들고 온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이방인들에게 오신 그리스도 또한 자신의 죄의 무게를 들고 자신을 포장하지 않은 순수한 이기적인모습을 들고 와야만한다. 내 자신이 항상 1순위였던 모습, 계산적이고 간악한 모습을 들고 와야만 내가 그리스도께 반납되어 그리스도가 내 주인이 되셔 내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의 악이(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날까 봐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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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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