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마태복음1:18-25
제목: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으로 오시는 이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 앞에 인격적으로 오시는 이유는,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은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다. 만약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법대로 심판하신다면,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거역한 죄 때문에 한 사람도 살아날 수 없게 된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당신의 인격적인 아들을 이방인들 앞에 보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으로 오신다는 말은, 그가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시겠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 인간들과 똑같 모습으로 오시는 이유는, 인간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서다. 그가 인간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알아야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고 오셨던 이유도 바로 인간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서 요셉의 집에서 30년 동안 목수 일을 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것은 바로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맛보기 위해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알아야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구약에도 나온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자랐지만, 그가 장성하여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기 동족들이 바로에게 고통당하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자기 힘으로 동족들을 구해보려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 동족 중 하나가 감독관에게 심한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분노를 이기고 못하고 쫓아가서 그 감독관을 단번에 죽이고 만다. 모세는 그 일로 왕궁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40년을 연단을 받은 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다시 자기 동족들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 백성들 앞에 인격적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모두 맛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는 불쌍히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이 생략된 체 하나님 법대로 심판하게 된다면,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한 사람도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법은 인간들의 죄를 깨닫게 할뿐, 인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이 그렇고, 오늘날 성령을 말미암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다 주신 영적인 율법이 그렇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을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경우를 두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바울의 이 말은 율법 아래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 인격적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를 가장 잘 표현한 곳이 바로 나인성 과부이야기다. 예수께서 나인 성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데 그 뒤를 따르던 어미가 슬피 울며 통곡하는 것이다. 그 어미는 평생을 과부로 살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의지하고 살았는데, 아들이 그만 죽고 만 것이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는 것이다. 만약 이 과부가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 아들은 자기 죄로 인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항변할 말이 없다. 그런데 다행히 예수를 만나 다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법대로 따지자면, 예수 역시 인간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만 그를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과부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인간들 앞에 인격적으로 보내신 이유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의 기준이 되시기 때문에, 죄악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날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 법에는 자비가 없다.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이 그렇고, 오늘날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주신 성령의 법이 그렇다.
따라서 하나님 법대로만 따지게 되면, 인간들은 죄 때문에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 특히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더더욱 한 사람도 살아남을 자가 없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 모두가 마음이 부패하여 성령의 뜻대로 산 자가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법대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아들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시고, 사람들 앞에 보내서 그들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헤아려서, 그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5-16).
성경에는 이렇게 죄와 상관없이 예수로부터 불쌍함과 긍휼함을 입어 구원에 이른 자가 한두 명이 아니다. 이는 모두 예수께서 인격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예수께서 사람 모양으로 오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유대인들은 모두 율법을 어긴 죄인들이기 때문에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유대인들 중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께서 나온 자가 몇이나 되던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에 이르게 하셨던 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격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방인들 앞에 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역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와 똑같은 사역을 하시게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 하신 후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그리스도 영이 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그리스도 영이 되셨다는 말은, 이제 예수께서도 그리스도 영으로 각 사람 마음속에 오실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예수를 죽인 마귀가 세상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자,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 곁을 떠났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각 사람 영(靈)속에 오신 것과 같은 이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셨던 사건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바울 마음속에 영(빛)으로 들어가서 바울의 입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리셨다. 그리고 2천년을 기다리셨다. 이제 이방인의 때가 되어 그 열매를 수확하러 다시 오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번에도 영(빛)으로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통해 인격적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가 인격적으로 오시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역시 모두가 성령을 거역한 죄인들이라서 법대로 따지게 되면, 성령을 거역한 죄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을 자가 없다. 하나님 법은 엄격하여 1원을 도적질해도 죄가 되고, 천원을 도적질해도 죄가 된다. 심지어 마음으로 미워만 해도 살인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죄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 법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도 기독교인들의 이런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람들 앞에 인격적으로 보내서, 하나님 아들로 하여금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격적으로 오셨을 때, 마음이 높아진 자들과 교만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작은 소자를 통해서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모양도 없고, 고운 풍채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통해서도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 그가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이 오시다보니, 유대인들이 예수를 홀대하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냐?"는 속담까지 생겼났다고 한다.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마음 둘 곳에 없는 영적인 고아와 영적인 과부들에게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영적인 고아란? 육적인 부모가 있어도 영적인 말씀으로 자녀를 돌보지 못하고 버리지는 아이들을 영적인 고아라 부르며, 영적인 과부란? 육적인 남편이 있어도 영적으로 아내를 돌보지 못하고 버려진 여자들을 영적인 과부라 부른다. 이런 자들에게도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부모가 되어주고, 영적인 남편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곤고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인격적으로 오신 예수께서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이방인들 앞에 인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에게 소외받고 억압받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억눌리며 살았던 자들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으로 오셨을 때 이루어 질 일이다. -귀 있는 자들은 듣고 깨달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