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새 것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겨울이 오는 것은 누구도 변개할 수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한번 지나간 봄은 그해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봄이 오려면 그 다음해로 넘어가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기에는 “올해 못했으면 내년에 하지...”라며 자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 못했으면 오늘로서 그것은 끝이다. 하나님에게 내일이란 단어는 없다.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표현을 빌려서 굳이 내일이란 말을 쓰고 싶다면 내일은 “새로운 날”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던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만을 자신들의 최고의 법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날이 밝아 예수라는 새로운 성전과 새 계명을 주실 분이 오셨는데도 새로운 성전 앞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낡고 보잘 것 없는 예루살렘 성전으로만 모여들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새로운 성전이란 사실을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것은, 결국 자신들의 의로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볼 줄 몰라서 새로운 성전을 찾지 안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여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층에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또는 율법사들과 자주 마찰을 빗게 되었던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하나님께서는 옛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한 율법을 지키게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셨으나, 그들이 법을 어기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성전에 나와 제사 드리는 것을 탐탐치 않게 여기시던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시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예루살렘 성전을 버렸다는 말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 버린 성전에는 다시는 찾아가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특성이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시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서 예수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만나로 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사람도 예수 앞에 오지 않고 도리어 버림당한 예루살렘 성전만 찾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우매함이다.




이것을 성경을 통해서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실상은 어떠한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을 보면서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모두들 손가락질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도 자기 조상들이  광야 생활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다 멸망한 사건과 노아 홍수사건을 보면서 모두들 그들을 비웃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오늘날 기독교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후세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 성령까지 받은 사람들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고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자기 마음속을 비추어 보았다면 자신이 어떤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사 보내신 하나님 아들을 믿지 못하고 썩어빠질 교회 건물에만 매달리고 있었냐는 것이 그 이유다. 

기독교인들이 더욱더 답답하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은 노아 홍수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에 이르는 광야생활과 또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충돌과정을 모두 신약성경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는 눈곱만큼도 살필 줄 모르고, 자신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만 다니면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교회만 죽어라고 다녔다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도 미련 없이 버리시는 분이라면, 아무리 예수님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예배당이라면 과감하게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도 없이 그저 입술만 살아서 예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본질을 따라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두움만 가져다주는 그런 예배당이라면 예수께서도 그런 곳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역시 손으로 지은 예배당을 패하고 다른 통로인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만 인간들을 만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죽자 사자 법에만 매달려서 예배당만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자들은 필경은 모두 멸망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중학교에 올라가면 초등학교 때의 생활을 모두 버려야 한다. 중학교 올라가서도 초등학교 때의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려한다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학생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서 영적인 법아래서 신앙생활 할 때는 그것이 최고의 법이며 최고의 신앙생활이다. 

그러나 마음이 부패한 인간이 성령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타락하지 않고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 수는 없다. 육신의 소욕을 억제하지 못해서 마음이 심하게 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당만 찾는다는 것은 불 꺼진 난로에 손 얹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다. 한번 꺼진 난로불은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는다. 어떤 교회들은 이것을 세상이치에 맞추어서 되살려 보려고 부흥에다 뭐다해서 온갖 요란법석을 떨어보지만, 아무리 능력 있는 부흥사를 모셔다 집회를 해도 말씀을 듣는 그때뿐이지 그것이 영원히 회복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것을 되살려 보려고 개인적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서 기도원은 항상 만원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번 잃었던 첫 사랑을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질 것 같으면 하나님 아들이 다시 오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아들이 다시 오시는 것이다.




아들이 오시게 되면 잃었던 것을 다시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롭게 만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세상 개념으로는 잃었던 것을 다시 회복하는 줄 알고 죽어도 우리의 옛 것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옛 것을 놓아버려야 아들로 말미암아 새롭게 다시 빚어질 텐데 죽어도 나의 옛 것은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 새롭게 빚어지기만을 고대하고 있으니 새롭게 만들어질리 만무하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들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은 잃었던 첫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잃었던 것을 회복하는 것이야 옛 과거를 버리지 않고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새롭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옛 과거를 놓아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새것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예배당을 패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모형으로 주어졌던 예배당이 실체인 하나님 아들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패하여지고 아들로 말미암아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말씀 역시 귀 있는 자만 깨닫게 될 것이다.
 

공유하기
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30 21:15
조회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