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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마태복음9:9-13

제목: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9:11-13)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 그래야 유대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오신 예수를 통해서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를 모르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예수를 배척하였다. 그들 중에도 특히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의롭게 여긴 나머지 예수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충돌을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다 보니, 자신보다 못한 자들을 모두 죄인 취급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우리가 눈여겨볼 말씀은, 예수께서는 마태가 먼저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마태를 부르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르신다고 해서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나선 마태의 행동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어떻게 마태가 따라 나설 것을 미리 아시고 마태를 부르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 또한 당시 예수는 이단 괴수로 지목을 받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가 부른다고 하여 하던 일을 버려두고 무작정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냐는 것이다.

 

당시 예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53:2).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당시 예수의 생김새는 우리가 상상하던 그런 모습이 아니라 정말 볼품없고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거기다 바리새인들에게 이단 괴수로 낙인 찍혀 예수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였다. 그런데 예수가 부른다고 하여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나선 마태의 행동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예수께서 마태를 일방적으로 부르신 것을 두고, 오늘날 지어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예수도 하나님처럼 전능하신 분이라서 마태의 마음을 미리 꿰뚫어 보시고 마태를 부르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예수님 말씀에는 권세가 있기 때문에 마태가 꼼짝 못 하고 따라 나섰을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해석 같지만 정확한 답은 아니다.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삭개오를 부르는 장면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삭개오 역시 세리로서 자기 동족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삭개오는 늘 마음 한구석이 공허했다. 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공허한 마음이다. 그런데 예수가 자신같이 비난 받던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에, 예수가 자신이 살던 곳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키 작은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서 예수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알아차린 예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에 집에 들어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오늘날 이방인들 앞에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 역시 기독교인들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마음 중심을 살피시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와 같이 불안한 마음으로 세관에서 일하던 마태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마태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던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세리로 살다 보니 늘 자기 동족들에게 손가락질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런 마태 역시 그때까지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던 차에 예수께서 세관 앞을 지나가시다가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자, 즉시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모함이 없이는 쉽지 않은 행동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삭개오도 세리요 마태도 같은 처지에서 일하는 세리였는데, 삭개오는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으나, 마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삭개오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했던 것은, 삭개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의 절반을 내놓았을지언정 자신이 하던 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지 않았던 반면, 마태는 자신이 하던 일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를 쫓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께서는 아무나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도 예수께서 이적을 보여주시자, 그것으로 보고 자신이 하던 일들을 모두 버려 두고 예수를 쫓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 중에는 스스로 목사가 된 자가 있는가 하면,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목사가 된 자도 있다. 스스로 목사가 된 자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말씀을 가르치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인들을 배나 지옥 자식 만들기 때문에 나중에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성령이 세운 목사들 또한 교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할 뿐,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마치 구세주(그리스도)라도 된 것 마냥,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며 억지로 성경을 풀어 가르치다가는 숯불을 자기 머리 위에 쌓는 우를 범하게 된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실 분은 오직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의 법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죄를 얼마만큼 깨닫고 있을까? 기독교인 누구도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모두가 어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깨닫게 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다.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성령(율법)으로 구원 받았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두 백성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이 닮을 수가 있을까 싶다. 기독교인들은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유대인들이 하던 짓을 기독교인들 역시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이방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깨닫게 하려고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성령을 통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야 하는데, 죄인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우쭐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아가기는커녕 도리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것과 너무도 닮았다.

 

이방인들이 정말 영생에 들어가고 싶으면 먼저는 성령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아가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 2천 년 역시 마지막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음속의 죄를 해결 받고 영생에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방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죄악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성령을 받아도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은 절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게 되면 어찌 되겠는가? 


이방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은 좀처럼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지 않는다. 죄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다 보니, 이방인들이 겉으로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선한 척 고상한 척하며 사는 것이다그러다가 가끔 한번씩 화를 내게 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평소에 순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것은 참았던 악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화를 내는 것은 악한 영이 자신의 정체를 잠깐 동안 들어내는 순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마음속에 꼭꼭 숨어 있는 죄악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게 되면, 자신들도 유대인들처럼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착하게 포장하여 살던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생각에 더욱더 자신을 착하게 포장하는 것이다. 악한 영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싶기 때문에 겉으로 포장을 한 것인데,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자 악한 영이 속에서 쾌재를 부르며 좋아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장작 더미 위에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다.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해서 죄인이 되어 있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착하게 위장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자신을 포장하는지 살펴보자! 성령을 받기 전에는 술 담배를 하던 사람이 그것을 끊음으로 착하게 포장을 하고, 도적질 하던 사람이 도적질을 하지 않음으로 착한 사람으로 포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맨날 욕하던 사람이 욕을 하지 않음으로서 착하게 포장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 잠시 육신의 소욕을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속 사람까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성령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죽여도 속에는 여전히 죽은 영이 왕 노릇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가 소멸되면 언제든지 다시 옛 사람으로 돌아가고 만다. 오늘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으로는 누구도 온전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이 죄인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착해져 버렸으니,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신 목적이 무색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줘서 바로 잡아야 하는데, 아직도 죄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이런 일을 할 수가 없다. 기독교인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깨닫게 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이방인들이 성령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아 가는 방법은,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누구나 성령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성령의 뜻이란?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서,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은 반드시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성경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는 것이다. 왜 성경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죽은 영)가 방해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자범죄이다.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이런 죄악을 깨닫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의 법아래 갇혀 있는 죄인들이다. 그런데 기독교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어 있어야 할 기독교인들이 도리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선한 모습으로 위장을 하자, 기독교인들 마음속에서 주인(왕)노릇을 하던 죽은 영(죄악)’이 쾌재를 부르며 좋아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속에서 죽은 영 쫓겨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찌그러져 있을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며 교만하게 되자 죽은 영이 이제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쾌재를 부르며 좋아하는 것이다


오늘날 악한 영은 기독교인들을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로 속이고 하늘 꼭대기에 올려다 놓고 절대 거기서 내려오지 못하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은 기독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오직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를 깨닫게 하러 오셨다고 말을 해주는데도, 기독교인 누구도 이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있다. 결국 기독교인들 또한 그리스도 예표로 주신 것들에게 발목이 잡혀 좀처럼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두고 성경은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5:39).


이와 같은 일은 유대인들도 똑같이 그러고 있었다. 당시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은 모두가 율법을 거역한 죄인이 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죄인이 되어있기는커녕 모두가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우쭐되자,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들이 유대인들을 하늘 꼭대기에 올려다 놓고 절대 거기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예수를 이단 괴수라며 배척하게 만들더니 결국 유대인들을 지옥 자식 만들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유대인 모두를 율법아래 가두어 놓은 다음, 유대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육체를 입은 예수를 보내서 율법아래 갇혀 있던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런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모르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며 예수를 배척하다가 끝내는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목적 또한 성령을 받은 기독교인 모두를 성령의 법아래 가두어 놓은 다음, 기독교 2천 년 역사 마지막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서 성령의 법아래 갇혀 있던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법(율법)으로 구원 받았다며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귀 있는 자는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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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1-05 00:00
조회
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