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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의 주일 말씀

본문: 로마서9:30-33

제목: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보라 내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은 과연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 둘 다 예수를 두고 하는 말 같은데, 그렇다면 왜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유대인들 앞에 오시는 예수와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부딪치는 돌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거치는 반석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일까? 그것은 바로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독교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런 말이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4천 년 전에 이삭과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땅에 오실 메시아와 이방인들 앞에 오실 메시아를 미리 예표해 주셨다. 이삭이 이스라엘 땅에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고 있다면, 야곱은 장차 이방인들 앞에 오실 메시아를 예표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해서 반드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거나 사람을 통해 예표로 보여주신 다음, 그 일들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 만약 어느 누가 성경에 예표로 말씀하신 것들을 말만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선지자요 거짓목사요 거짓그리스도가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자는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고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예표로 예수를 유대인들 앞에 보내서, 율법을 거역한 유대인들을 죄에서 구원토록 하셨다. 그리고 야곱의 예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방인들 앞에 보내서,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토록 하셨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만 믿으면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까지 모두 해결되는 줄 알고 있는데,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도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은 율법아래서 태어난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도 마음속의 죄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는 오직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지은 '자범죄(율법을 거역하고 지은 죄)'만 해결하여 주신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자범죄(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죄)'는 오직 이방인들 앞에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만 해결하여 주신다. 


만약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 이방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까지 해결해 주실 것 같았으면, 하나님께서 이삭 하나만 예표로 세울 것이지 굳이 야곱까지 예표로 세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들 앞에 오실 구세주가 각각 다른 성품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야곱을 각기 다른 모양으로 세워서 예표로 보여주신 것이다. 유대인들 앞에 오실 예수는 이삭처럼 순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바리새인들과 부딪히는 돌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야곱처럼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반석처럼 거친 모습을 하고 오시는 것이다.     

 

그럼 예수가 왜 유대인들 앞에 부딪치는 돌로 오셨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키는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다니는 것이다. 유대인들 눈으로 볼 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하고 다니는 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기 때문에, 율법을 거역하여 병든 자를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예수로서는 당연한 의무였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식일을 범하고 다니는 이단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결국 안식일로 유대인과 예수가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예수가 부딪히는 돌로 작용하였던 것은, 유대인들은 이천년 동안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성전을 목숨처럼 여기고 있다. 로마의 장군하나가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일하던 자들이 들고 일어나, 자신의 목을 내밀고 차라리 우리 목을 치고 가라고 했던 것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 성전을 자기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을 허물면 3일안에 다시 짓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보면 얼마나 기가막힌 일이겠는가? 그러나 예수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이를 알지 못한 유대인들로서는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세 번째 예수가 부딪치는 돌로 작용했던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어디서 사람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흥분하여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 했던 것이다. 당시 예수는 죄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해도 전혀 틀림 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한다며, 아버지가 보내서 온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유대인들과 부딪쳤으니, 당시 누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늘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가, 나는 예수와 하나라고 말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울처럼 빛(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로서는,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나서 자칭 자신이 재림예수요. 감람나무요. 두 증인이요. 보혜사 성령이라고 말하며, 기성교인들의 생각을 어지렵혀 놓았기 때문에 진짜 그리스도가 오셔서 말씀을 하시더라도, 기성교인들로서는 그도 이단중의 하나로 보고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단들이 노리는 목적이다. 이단의 영(적그리스도 영)을 받은 자들이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사냥하는 것 보다 진짜 그리스도가 사람을 통해 오셨을 때, 그를 못믿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단들이 미리 들고 일어나 기성교인들로 하여금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미리 더러운 오물들을 뿌려놓는 것이다.  

    

이밖에도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려던 유대인들과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와의 부딪힘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너무도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사실이 이렇다보니 율법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었으니, 세리와 창기와 그리고 율법을 거역하여 육체가 병든 자들이다.

 

사실 그들도 예수를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 아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자기 동족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받아 왕따를 당하다보니, 마땅히 누구를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가 자신 같은 자들을 반갑게 맞아준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거역하여 육체가 병든 자들 역시 자기 몸이 병들어 죽어갈 때, 어느 누구도 자신을 거들떠 보지 않는데, 소문을 듣자하니 예수가 병든 자를 고쳐준다는 말에 예수를 찾았다가, 율법을 거역한 죄도 사함 받고 병도 고침 받게 되었다. 결국 자기 동족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로 육체가 병든 자들이 예수를 믿고 천국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방인들 앞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과 어떤 일로 마찰이 빚어지게 될까? 오늘날 기독교인들 앞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과 율법도 없이 개, 돼지처럼 살던 이방인들과 차이가 여기서 극명하게 갈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율법의 보호를 받고 태어나기 때문에, 처음 태어나서는 마음속에 죄가 없다. 그러다가 율법을 거역할 때, 죄가 유대인들 마음속에 하나 둘씩 침투해 들어가게 된다. 율법은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라서 유대인들이 하나 둘 율법을 범하다보면, 끝에 가서는 모두가 율법아래 갇히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때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께서 율법을 거역한 죄를 즉시 해결해 주시기 때문에, 유대인들 마음속에서 죄가 단번에 사라지게 된다. 열두 제자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예수를 통해 자범죄(율법을 거역한 죄)를 사함 받았던 것이다.


유대인이라도 율법을 거역한 자범죄만 사함 받아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고, 아담이 지은 '원죄'까지 해결 받아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는 방법은, 마지막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흘려주신 피를 통해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게 된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자범죄를 사함 받은 유대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과 혼()(마음)이 죄에서 자유케 되어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죄악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날마다 죄악을 먹고 마시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이방인들을 개, 돼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음속에 죄악을 가지고 살던 이방인들이 전도를 받아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자, 이방인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흘려주신 피를 통해 아담이 지은 원죄를 해결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도 이방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속의 죄가 도말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달리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도 곧장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로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곁을 떠나자, 마귀가 인간의 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흘려주신 피를 통해 아담이 지은 원죄가 해결되자, 인간의 영을 지배하던 마귀가 떠나게 되고, 성령께서 다시 그 자리에 오셔서 인간의 영()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아도,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럼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는 누가 해결해 주는가? 그것은 기독교 이천년 역사 마지막에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해결해 주신다.

 

그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죽은 기독교인들은 다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럼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죽은 구약의 유대인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다. 예수가 오시기 전에도, 구약 때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구약의 사람들은 다 구원해 주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목사)를 기독교인들 앞에 보내서, 그들의 말을 듣고 순종했던 사람들은 다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선지자의 말을 불순종했던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구약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라고 해서 다 똑같은 선지자가 아니듯이, 오늘날 목사라고 해서 다 똑같은 목사가 아니다.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운 목사가 있고, 스스로 목사가 된 자들이 있는데, 후자에 속한 자들은 거짓목사이거나 품삭을 받고 직업적으로 목회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교인들에게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러다보니 교인들은 계속해서 세상에 속한 달콤한 말만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목사들의 달콤한 말을 들으려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서 교회가 부흥되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만든 하나님과 자기가 만든 예수를 믿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는 무조건 가짜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악이 관영해지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선지자들을 하나님 백성들 앞에 보내지 않게 되었다. 유대인들 앞에도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고, 기독교인들 앞에도 기독교 이천년 역사를 끝으로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 백성들이 급속토록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이후부터는 선지자 대신, 하나님 아들을 보내서 죄인들을 구원토록 하셨다. 그렇게 하여 유대인들 앞에는 육체를 입은 아들을 보내주셨고, 기독교인들 앞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거듭난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성령과 그리스도 영을 동일한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령을 받으면 무조건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 영으로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오시지 않기 때문에,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죄악이 그대로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날마다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던 죄악(죽은 영)들이 쾌재를 부르며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인들 또한 교만해져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들을 지적해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교인들에게 달콤한 목소리만 들려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인들에게 쑥물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다. 결국 목사 자신도 소경의 길을 걷다보니 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들을 보지 못하여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목사가 교인들의 잘못을 알아도 그것을 지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도가 시험들까봐 잘못을 지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핑계일 뿐,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보니, 교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교인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지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운 목사는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낱낱이 지적을 하는 것이다. 그때 선지자(목사)가 교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기분 나쁘다며, 그를 떠나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그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선지자가 지적하는 말씀을 듣고 죄에서 돌이키는 자는 구원에 이르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10:41)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의 말씀을 끊어지자, 세상 지식을 가진 자들이 교회를 장악하여, 교인들에게 아주 달콤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달콤한 목소리에 길들여진 교인들은, 속은 썩어문드러지든지 말든지 겉만 거룩하게 꾸미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겉만 거룩하게 꾸민 자들 앞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던 죄악들을 낱낱이 지적하자, 기독교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따지는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사랑이 많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잘못과 허물도 모두 덮어주시는데, 당신은 그리스도가 보내서 왔다면서 왜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들을 낱낱이 끄집어내서 괴롭게 하느냐?’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충돌이 생기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보게 되면, 예수는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 주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는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요 세리와 창기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의 친구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예수는 무조건 사랑을 나누어 주는 분으로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예수가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고 해서 무조건 아무에게나 사랑을 베풀지는 않는다. 오직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예수를 대적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 앞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 역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 기독교인들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던 악한 영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날이면 악한 영들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악한 영들이 기를 쓰고 그리스도를 못 믿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악한 영에게 속아서 덩달아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얼마나 악한 영에게 속아 살았던 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인 것은 인간이지만, 시실은 인간 속에 숨어 있던 마귀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악한 영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했던 것은, 율법과 너무도 상충되는 일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너무도 살벌하게 까발리는 바람에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그리스도 입장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숨기고 있는 죄악들을 까발려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까발려야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죄악을 까발리는 그리스도가 너무도 싫은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좋아하지만자신의 죄악을 까발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싫다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죄악과 허물을 덮어주는 예수는 좋지만, 자신의 죄악을 까발리는 그리스도는 싫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까발려서, 기독교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부득불 기독교인들의 죄악을 까발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인들 앞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말씀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 과연 자신의 죄악을 까발리는데, 그를 예수께서 보낸 그리스도로 믿고 나올 자가 몇이나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귀 있는 자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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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0-12-06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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