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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많이 탕감 받은 자

많이 탕감 받은 자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에게 돈을 꾸는 것이 쉽지 않다. 돈을 꾸어야 하는 사람도 오죽 답답했으면 남에게 돈을 꿀 수밖에 없는 처지였겠지만, 어렵게 빌린 돈을 만약 제날짜에 갚지 못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한다. 이럴 때, 어떤 구세주라도 나타나 남에게 빌린 돈을 대신 갚아 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바램은 남에게 돈을 빌려 써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한두 번쯤 경험해 봤을법한 일이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예수께 청하여 자기 집으로 가서 식사라도 같이 나누기를 청하였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말을 듣고 그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취급받던 한 여인이 향유(香油) 담은 옥합(玉盒)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예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마음에 집히는 데가 있어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죄인인 것을 곧 알았을 것이리라(38-39)” 
당시에 바리새인들 중에서 예수를 청하여 자기 집에 가서 식사를 할 정도의 예의를 갖춘 자라면 그 시대적 배경으로 바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부하고 있던 바리새인이 예수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바리새인은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죄인으로 여겨지던 한 여인이 예수를 찾아와 하는 행동을 보고 있다가, 예수께서 죄인인 그 여인을 뿌리치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는, 예수를 선지자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만다. 그러니까 경건하다고 하는 그 바리새인도 결국은 거기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예수는 그런 마음을 먹고 있는 바리새인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한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우리말로 해석하자면,‘어떤 사람에게 돈을 빌린 사람 둘이 살고 있었다. 한 사람은 2천5백만 원의 빚을 졌고, 한 사람은 2백5십만 원의 빚을 졌다. 둘 다 너무 가난하여 갚을 것이 없으므로 탕감하여 주었다.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 바리새인은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저를 더 사랑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예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그러시면서 “이 여자를 보느냐?”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죄인이라고 업신여기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橄欖油)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3-46)” 예수께서는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저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적게 받은 자에게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향해 “여자여 네 죄(罪)사함을 얻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도 자신이 탕감 받은 죄만큼 주님을 사랑하실 것을 여전히 말씀하시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절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꼭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그저 형식적으로 주님을 대우하고 마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 하려면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 어떤 죄인인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신 빚쟁이의 탕감 비유에서도 보듯이,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저를 사랑할 수 있듯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려면 내가 주님에게 얼마만한 빚을 졌는가를 먼저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 많은 빚을 주님으로부터 모두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 말씀에도 절대 순종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세상을 의식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의식하고 주님만 의지해서 살게 된다. 그러니까 죽든지, 살든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말로는 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 돈으로 환산하더라도 금1만 달란트이니 우리 돈으로 따져도 약 4조원에 가까운 돈이다. 주님은 그 많은 빚을 모두 다 탕감 해 주었다. 본문에 나오는 죄인인 그 여인은 자기가 아끼던 향유와 자신에게는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헌신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그 많던 죄를 모두 사함 받고 의인이 되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피값을 주고 마귀로부터 사온 귀하신 몸들이다. 그런데도 주님을 사랑할 줄 모른다. 고작 사랑한다는 것이 겨우 입으로 부르짖는 말뿐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인간들 사랑하는 것을 행동으로 손수 보여 주었건만,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로만 사랑을 외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이 얼마만한 죄인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빚에 대해 탕감 받은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행동이다. 주님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맞이했던 그런 여인을 찾고 있다. 이런 사람이 그야말로 주님 말씀에도 순종하고, 주님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잘 듣고 따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깨닫고 있는지 점검 해보자,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있는 자만이 주님께 순종할 수 있다. 또 이런 사람만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 여러분들은 지금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깨닫고 있습니까? 또 깨닫고 있다면 얼마나 깊이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시다면 주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계십니까? 순종하고 있다면 주님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게 습니까? 주님은 지금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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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2-09-19 19:47
조회
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