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네 믿음의 행위를 내게 보이라!

주일 낮 설교

본문: 야고보서2:14-26

제목: 네 믿음의 행위를 내게 보이라!


성경은 창세기부터 믿음으로 시작하여 끝마치는 계시록까지 믿음으로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진전 될 수 없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이 세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물리학과 지질학을 연구해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을 계시하신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또 그것을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볼 때만이 믿음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나누어지게 되는데,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눈으로 보고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겉으로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육신적인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믿음은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감탄하고 믿는 믿음이거나 아니면, 어느 누가 어떤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줄 때,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믿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다. 또한 이런 믿음에는 깊이가 없기 때문에 태풍이나 비바람이 몰아치게 되면 언제든지 넘어 질 수밖에 없다. 구약의 율법아래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런 믿음을 소유한 자들로서, 그들은 자꾸만 그들 눈앞에 하나님을 대리한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나타나야 만이 믿음 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가 눈에 보일 때는 그런대로 잘 믿다가도, 하나님의 임재가 잠시라도 그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 그들은 단번에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는 생활 속으로 빠져들곤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바로 이런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지금은 영적인 시대라서 성령하나님도 내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되었듯이, 예수도 내 속에서 내가 손으로 만져 보듯이 느끼고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두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고, 자꾸만 겉으로 예수를 믿으려 하는 것은 거짓에게 자신이 철저하게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제 두 번째 믿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두 번째 믿음은 마음속으로부터 믿는 믿음이다. 첫 번째 것이 눈으로 보고 겉으로 믿는 믿음인데 반해서, 두 번째 믿음은 손으로 만져 본바 되었듯이 마음으로부터 확신에 찬 믿음이다. 확신에 찬 믿음이란 말은 ‘내가 소유했다’ ‘내가 가졌다’라는 말과 같다. 첫 번째 믿음에서는 앞날을 장담할 수없지만, 두 번째 믿음은 내가 손으로 만져본 바라서 앞날을 장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믿음은 그 첫 번째 것을 시작으로 하여, 두 번째 내가 직접 손으로 만져본바(체험)얻게 되는 믿음으로서,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내렸는데 “그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믿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확신에 찬 믿음이다. 믿음은 바로 이렇게 주님 말씀을 듣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때, 얻어지게 되는 믿음으로써 이런 믿음은 결코 변혁될 수 없는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다가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를 통하여 나의 원죄가 사함을 받고, 그 보증으로 내 영속에 성령하나님께서 내 주하셨을 때 모두가 얼마나 기뻐했는가? 그때 당시에는 성령에 취해 혼자 예수 다 믿는 사람처럼 야단법석을 다 떨었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성령 충만한 모습은 사라지고, 점점 내속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서 차츰 차츰 세상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왜 예수를 믿으면 죄악된 세상과 멀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텐데, 성령 받았을 때 잠시 뿐이고, 그 후로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마는가? 성경에는 분명히 새로운 생명으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되어 있는데,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가 잠시도 자신 곁을 떠날 줄을 모르지 않는가? 또한 성경에는 믿음의 일꾼들이 즐비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나는 과연 그런 자들과 비교하여 그만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자신의 현재처지를 성경과 조금만 비교해보면 자신이 너무나 성경과 안 맞는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비교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교하다보면 불안해서 그날부터는 잠을 못 이룰 테니까?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첫 번째 믿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다. 그것은 거의 가 말로 하는 믿음이기 때문에 너무나 쉽고, 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런 신앙생활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또 쉬운 만큼 거기에는 어떤 생명도 보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믿음은 주어진 말씀 속에다 나를 그 속에 집어넣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서, 결국 나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값진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자신을 희생하는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또 이방 기생인 라합도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소문만 들었지 실지로 그 이적을 눈으로 본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소문만 듣고도 자신의 행동을 과감하게 옮김으로써 예수님 족보에 들 수가 있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복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런 복을 받기 위해 거기에 따르는 고난도 가장 극심하게 겪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방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불러서 주님께서 강단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말씀을 해주시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말씀들을 과연 얼마나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또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가? 듣는 것은 100%를 듣는다면 실천으로 옮기는 생활은 단10%도 안 된다고 할 때, 그 나머지는 모두 불순종이라는 말인데, 그렇게 하고도 여러분들이 과연 온전해 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에서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이제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믿음의 행위들을 주님 앞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제는 여러분들에게 지금까지 지내온 것처럼 시간이 무한정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 여러분들은 강단의 말씀을 주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믿음이 자라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불순종하게 되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보장도 받을 수없다. 여기에 따르는 책임 또한 모두 본인 자신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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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3-07-13 22:22
조회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