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일 낮 설교

본문: 마태복음16:3-20

제목: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율법 아래서 살아가던 자들에게 안식일은 큰 명절이나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안식일의 유래는 율법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안식일이 갖는 무게중심은 곧 구원하고 직결된다. 안식은 곧 모든 일을 마치고 쉼을 뜻하는데,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다는 뜻도 곧,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날을 인간들에게 적용하게 되면, 모든 인간들이 죄에서 나와서 구원을 얻는 날이기도 하다. 죄악 된 인간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도저히 불가능하다. 아무리 그가 밤낮으로 성전에 나가서 수천수만의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드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예배당에 나가서 주, 야로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아무리 많은 십일조를 드리고, 평생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새벽기도를 드리고, 40일 금식기도를 밥 먹듯이 했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다. 오직 생명을 주시는 분을 나의 주로 믿어야 만이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인간들로 하여금 율법(성령)아래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 가도록 하신 것이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있어야 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셨을 때, “나는 죄인이요”하고 두 손을 들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 역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자들만을 찾아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그 첫 번째로 자기 백성들에게 오셔서 율법 아래서 살아가던 자들에게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고 하는데, 율법 아래서 살아가던 자들이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그만 눈이 어두워져서 생명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를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을 직접적인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으로 깨닫지 못하고,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선지자중(모세 혹은 다윗)의 하나쯤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이것은 보통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선지자들은 고작해야 성령의 감동으로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 역할을 맡아서 하거나, 아니면 예언하는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은 그들이 외치고, 예언했던 말들을 실지로 이루어 가실 분이시다. 그런데 그런 분을 말만하고 마는 선지자정도로 여기고 있었다면, 그가 하는 행동들은 결국 사람들 눈에 시비 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선지자들은 대단히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데 반해서, 아들의 삶은 사람들 눈으로 볼 때는 경건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예수를 선지자중의 하나쯤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은, 그때 당시로서는 예수를, 모세나, 다윗 같은 선지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갖다 놓는 파격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를 그런 자들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요 그렇게 되면 인간들에게는 유익이 없다. 모세나, 다윗이 예수가 오시기 전에 예표로 훌륭한 사역은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직접 백성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여행을 하시다가 물을 길러 온 한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생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수가 성 여인이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묻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 집안에 들어가서 오직 자식을 낳아주기 위해서 기다렸지만, 다섯 남자가 모두 씨를 받지 못하고 차례로 죽어 갔지만, 그 여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 남은 어린자식 같은 남자에게서 씨를 얻어 볼까하고 정조를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여인이었지만, 그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 조상들이 이 우물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도 이 우물물을 우리 후손들이 잘 먹고 있는데,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좋은 물을 줄 수 있습니까?’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여인이 예수를 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어서 그랬겠지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실 분을 육신의 목마름이나 해소해 주었던 야곱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성령 아래서 살고 있는 자들도,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암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온갖 이적과 기사를 나타낼 수가 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훌륭한 사역들을 잘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을 하나님 아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많은 능력을 나타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선지자들의 사역이나, 아들의 예표로 일했을 뿐이지, 그들이 결코 이방인들에게 직접적인 생명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육신을 입고오신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 아들을 믿으려고 보니, 겉으로 보아서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고, 또 성령의 능력으로 일했던 종들보다 결코 더 낳은 것이 없어 보여서, 도저히 못 믿겠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했던 자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여차하면 금식기도 해가며, 밤낮으로 철야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아들이란 자는 별로 기도도 안하고, 또 수요예배, 금요철야, 성찬식, 침례도 주지 않는 것을 보니까 도저히 존경할만한 것이 없어 보이더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까 완전히 왕처럼 굴림하고 있고, 성도들을 다루는 것을 보니까 마치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을 보니까 도저히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어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성령으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죄악을 보지 못하니까 하나님 아들로 보이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생명을 주시러 오신 분을 하나님 아들로 보지 못하고, 자신과 똑 같은 사람으로 보게 되면 모두가 망한다. 종들 아래서는 목사들을 그렇게 보는 것이 별로 죄가 안 되지만, 아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 마디가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소리요, 그가 주시는 선물이던지, 돈이던지 모두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선물을 주시는 대상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임을 깨닫고, 불평을 할 것인지, 아니면 감사를 할 것인지 자신이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쓰임 받는 강단은 오로지 주님께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 쪽에서 주님에게 감사를 하던지, 아니면 주님에게 불평을 하던지 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서, 아무리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죄악을 손톱만큼이라도 깨닫고 있는 자라면, 극도로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감히 주님 앞에서 함부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강단이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고 있는 줄을 알았다면, 함부로 성의 없이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속이고 육신으로 강단(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자체가 이미 주님을 속이고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속이면 즉각 주님하고 원수가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결국 화만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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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5-23 00:00
조회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