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저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탄생시키셨다. 아브라함은 전혀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된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그는 하나님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예정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하나하나 싹틔워간다. 그가 이런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믿음의 절정에 다 달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100세에 낳은 아들이라도 그를 바치게 함으로써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고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얻게 해주시고, 결국 인간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모두 그로 말미암아 축복을 누리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성경 말씀이 장차오실 아들을 예표 하고 있듯이,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이 태어나게 하신 것은 장차 오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 보여주신 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가 곧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요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삭의 아들로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뱃속에 쌍둥이로 잉태되었던 것은 장차 이방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인가 하는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그림으로서, 세상에 미쳐 태어나지도 않은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는 내가 미워하였고 야곱은 사랑하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말씀으로 인하여, 이방인들이 먼저 예수를 믿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들 모두가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는 자들이 먼저 태어날 것을 예표하고 있으며, 비록 세상에서는 보잘것없는 자들이지만 나중에 태어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태어나는 자니, 그가 곧 이방인 가운데 보내질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발은 이렇게 하나님의 많은 비밀들을 간직한 체, 출발하여 2000년의 많은 시간들을 흘러 보내고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며,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셨듯이, 시작도 하나님으로 시작했으면 그 끝도 하나님으로 마감 지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은 전혀 무가치한 인간(아브라함)을 불러내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정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인간만을 절대적 존재로 여기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만 내세우고 있으면 자신들도 자동적으로 하나님 품속에 들어가게 되는 줄 알고,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나온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지, 아브라함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은 이해하려고 하지 안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율법은 오히려 그들을 의로워지게 만드는 신앙생활의 한 수단이 되어 버렸고, 이런 폐단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과 원수만 되어 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생각은 오로지 ‘우리는 하나님의 벗이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생각만을 지닌 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조상들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줄로 알고 있었다.

 

사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나,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진 주의 종이라도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을 그렇게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또는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신 분이 더 중요한 것이지, 죄인 된 인간이 위대해 보일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자꾸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의로워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죄악은 숨긴 체, 인간의 어떤 동정심이나, 인간의 불쌍함을 입어서 자신도 그렇게 되어보겠다는 아주 고약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부분을 아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능력있는 주의 종에게만 잘 보이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 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이삭의 실제 모습인 예수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 주셨다. 하나님의 뜻대로라면 그들은 아들을 보고 당연히 기뻐하고, 즐거워 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질 줄로 알고 있던 그들에게, 웬 딱딱하고 볼품없는 모퉁이 돌을 보내서 믿으라고 했으니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매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르고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워 섬기다보면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작과 끝을 분명히 매듭지으시는 분이시다. 만약 이방인들이 앞서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그림들을 보고서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면 이방인들 역시 예수 이름만 부르다가 모두 멸망으로 가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방인들이 가장 심각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예수 이름만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을 했으면, 그것을 마감 짓는 일도 다시 예수로 끝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입으로 부르던 예수가 이제는 자신의 마음속에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이름만 부르고 있다가 망했듯이, 이방인들도 예수 이름만 불러가지고는 안되고, 이방인 가운데 야곱의 예표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믿고,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모셔 들여야 결국 망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는 말씀이 바로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의 요지로 보아 이 말씀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둔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반대로 그것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는 말씀이요 두 번째로는 장차 이방인 가운데 오실 하나님 아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다. 이 돌들은 인간 눈으로 볼 때는 너무도 딱딱하고 또 볼품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이 틀림없이 외면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 왜 그들이 딱딱하고, 볼품이 없게 생겼는가? 그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모두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를 책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볼품없게 하신 것은 겉치레를 좋아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눈을 가려서 모퉁이 돌을 믿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그러니 누가 그들을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라고 믿고 나올 수 있겠는가? 결국 이들을 믿고 나오는 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겸손히 낮추고 나오는 자들만이 믿게 될 것인데, 그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러분들은 현재 자신을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으며 또 자신을 낮추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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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3-11-02 19:59
조회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