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율법 아래서 살게 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낮추는 삶을 살기 원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기 보다는 도리어 율법을 통해서 의인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이런 폐단이 생긴 것은, 그들이 생각하기를 율법을 잘 지키면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도체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이스라엘사람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율법 중에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전에 나가서 소나, 양을 잡는 의식법이다. 저들은 그동안 수많은 소와 양을 잡으면서도 그것이 본질 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체 소와 양을 잡다보니 항상 몸 따로, 마음 따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빗대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느니라(사66:3). 하고 그들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마음에도 없으면서 어쩔 수없이, 혹은 의무적으로 성전에 나와서 소와 양을 잡는 것은 바로 우상에게 절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그런 식으로 소나, 양을 드렸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순전히 그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들 마음에서 하지 않는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우상 즉 귀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속에서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계속해서 거룩함으로 포장을 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중심을 살피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외모만을 살피셨다면 당연히 그들은 의로운 백성으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도 이스라엘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바깥 보다는 속이 더 중요하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인간의 외적인 상태보다는 내적인 상태를 더 소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즉 육체로 이루어 가는 그 법을 통해서 자신의 속마음을 살피는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가 오셨을 때 모두가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시인하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율법을 지켰다는 그것으로 몸 밖에서 깨끗해지는 그것이 곧 속마음까지도 깨끗해지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으로 의로워지려 하다가 결국 예수를 모두 배척하고 멸망으로 가고 말았다.


우리가 저들을 통해서 느끼는 교훈은, 오늘날 예수의 피 값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저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로워지려 하다가 저들과 같이 모두 멸망으로 갈 것이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먼저 보내주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속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생활을 하라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성령 받은 것을 가지고 구원 받았다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온전해진 사람처럼 기고만장하여 안하무인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는, 영적으로 오시는 하나님 아들을 무시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며, 또 스스로 의인이 되려하다가 모두 멸망으로 가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미가야 선지자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도 결코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중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기뻐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방인들이 성령 아래서 살고 있으니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된 줄로 알고, 교회 나오는 것도 의무감에 젖어서 나오고, 새벽기도, 삼일 밤 예배, 금요철야, 십일조도 의무감에 젖어서 어쩔 수없이 하는 것들 모두가 마음에도 없이 하는 것들이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들 모두가 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그런 사실들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자신들을 더욱더 낮 출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본인들에게 더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낮추게 될 때,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보내시는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성령 받은 것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들을 낮추지 못하게 될 때, 이방인들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하고, 또 열심을 낸다하여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니까 인간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외에는 아무도 알 수없듯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아버지 품속에서 나오신 유일하신 예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만이 아버지의 품속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예수를 내 안에 모시자는 것이다. 예수만 내안에 모시게 되면 나도 예수로 말미암아 아버지 즉,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들어드릴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도 내 몸을 던져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거짓도, 음란도, 탐욕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사랑만을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얻고자 하셨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낮추는 자를 찾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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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3-11-16 20:02
조회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