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은혜 아래서의 삶

주일 낮 설교

본문: 로마서6:12-23

제목: 은혜 아래서의 삶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살면서, 그토록 자유를 누려보려고 하였지만, 자유를 누릴 수가 없었듯이, 오늘날 성령 아래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에서 자유를 누려보려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오늘날 어느 누구라도 결코 죄에서 자유로워 질수가 없다. 혹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아래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 함을 얻었다 하여 스스로 자유인처럼 살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방종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서 살던 이스라엘백성들, 특히 그중에서도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으로는 그 어느 것도 온전케 할 수 없었듯이, 율법아래서의 삶 또한 그것을 아무리 오랫동안 지속해 왔을지라도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살던 자들이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율법의 완성 자가 오셔야 만이 비로소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율법 아래서 살던 자들을 속량해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율법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에,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마음과 영이 비로소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죄에서 자유를 누려보려고 약2000년 동안을 열심히 소를 잡고, 양을 잡아봤지만, 누구하나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까지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항상 자신의 죄를 먼저 해결 받는 의식을 행하고서야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지 아니하면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지성소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직분을 맡은 대제사장이 이 정도라면, 일반 백성들은 얼마나 더 연약에 휩싸여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단번에 해결해주시는 분이 나타나셨으니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율법 아래서 살았다는 말은 죄 아래서 살았다고 하는 말이다. 죄 아래서 살던 백성이, 자신들이 평생 동안 해결해 보려고 해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그것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들은 이제 그것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아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이 죽어야 해결될 수 있었던 일을 결국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그것을 해결해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 아들에 대한 감사가 자꾸 나오다보면 은혜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죄 아래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아들로 말미암아 다시 살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에 대한 진정한 은혜를 느끼는 자는 결코 아들을 배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자신은 보잘 것 없는 죄인이라서 자꾸만 작아지게 되고, 늘 자신 속에서 은혜를 끼치는 예수는 크게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은혜를 느끼는 자는 결국 나중에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내대신 죽어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다가, 감사한 마음은 결국 주님에 대한 은혜를 깨닫게 하고, 은혜는 결국 그를 사랑할 수 있는 힘으로 이어져 그때부터 주님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방인들 역시 율법 아래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두가 성령의 은혜 아래서 살고 있다. 성령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는 보호자 역할을 하신다. 언제까지 보호자 역할을 하시는가? 그것은 영적인 아들이 올 때까지만 보호자 역할을 하시게 될 것이다.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아래서 살고 있지만, 율법 아래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직까지는 모두가 영적인 죄 아래서 살고 있는 백성들이다. 이들 역시 영적인 죄(마음속의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리려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만이 비로소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오늘날 이방인들이 가장 큰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영적인 죄, 즉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미움, 시기, 질투 등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령 받은 것만을 앞세워 자꾸만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없었듯이, 성령께서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세상 밖으로 못나가게 하시기 위해서 개개인에게 은사를 주고, 각자가 성령 충만을 받게 하여서, 영적인 아들이 올 때까지 보호자 역할만 하시는 것이지, 성령께서 이방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를 없이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죄를 없이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아들이 오셔서 하실 일이다. 그러기 전에는 성령 아래서 살던 자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려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여기서도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자신이 예수 믿고, 성령 아래서 살고 있다하여 스스로 의로워지려 하는 자들로서,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있을뿐더러, 또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자들로서, 오늘날 내가 교회에 무엇을 했으니까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겠지! 하면서 자기의 어떠한 행위로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항상 마음속에 죄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과 초조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가 쌓인다. 혹시라도 이런 자들에게 ‘당신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지옥가게 되!’라고 한마디라도 하게 되면 얼굴이 벌개가지고 욕을 하며 노발대발 난리가 난다. 그것은 자신이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이것이 바로 어떤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 가려고 하는 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들도 처음에는 예수를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살고 있으니까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지만,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성령 충만함이 사라지고, 대신 육신의 소욕이 점점 더 올라오는 것을 보고, 왜! 그러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아직도 죄(미움, 시기, 질투)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 아래서는 죄만 깨달을 뿐 어느 누구도 온전케 될 수없음을 깨닫고, 그때부터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신앙생활에 임하다가, 영적인 아들이 오셔서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그때부터 나 자신을 내려놓고, 그 아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니, 그때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서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영적인 죄악들이 사라지고, 대신 아들의 영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니, 이것이 바로 감사요 은혜가 아닌가?


그동안 성령 아래서 살면서 성령 충만함으로 살아가려고 그렇게도 발버둥쳐 보았지만, 그것도 금식하고, 회개할 때뿐이고, 다시 시간이지나면 옛 생활로 돌아가던 신앙생활이 이제, 그 아들을 내 마음속으로 믿고 받아들이니, 일년 365일을 주님 안에서 보내게 되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서 사신 것이라!’ 사도바울은 자신이 율법 아래서 살면서 그것이 최고의 신앙이요 그것이 최고의 믿음인줄만 알고 살다가, 예수를 만나고 나니,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은 자요 죄인이었던 것을 깨닫고, 구구절절한 표현으로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은혜를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자는 절대로 자신이 의인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치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은혜와 감사만 나타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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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3-12-28 20:25
조회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