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주일 낮 설교

본문: 마태복음9:14-17

제목: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당시 율법 아래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축복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큰 짐이 되기도 하였다. 율법 아래서 축복이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려고 발버둥쳤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된 것이고, 법을 따라 살기를 싫어하던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도리어 큰 짐으로 느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란 즐겨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으로 작용하지만, 자꾸만 그 법을 피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법이 자기에게 올무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난데없이 나사렛 촌구석에서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자신을 메시아로 지칭하며 자신의 말씀을 믿을 것을 강요하자, 그 말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를 정말로 메시아로 믿어야 할지 아니면, 그의 말을 그냥 흘려보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당시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안내하는 사역을 맡은 침례요한의 제자들마저도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하는 말로 예수에 대하여 반신반의 하고 있었으니, 그 때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깊은 뜻을 헤아린다는 것은 하나님 품속에서 나오신 아들이 아니고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그렇게 물어오자 답변을 해 주시는데, 그 답변 또한 인간들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말씀처럼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을 그냥 무심코 듣고,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해본다면 ‘아니! 누가 신랑이고, 누가 손님들이란 말인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신랑이요 자신의 제자들을 손님으로 비유해서 말한 것이지만, 듣는 쪽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 쪽에서 바라보면 예수도 분명히 하나의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너는 왜! 율법이 지적하는 대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지 않는 거냐?’하고 반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은 종이라서 살기 위해서는 법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자기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며, 주인은 그 법을 집행하시는 분이요 그 법을 완성시키려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종들이 그렇게 금식한다고 해서 주인까지 덩달아서 금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리어 주인이 금식을 하게 되면 모양새만 더 우습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것을 자세히 더 설명하시기 위해서 생베 조각이야기를 말씀하신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 보았자 도리어 그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기게 되므로 옷만 모두 해어지게 되어 결국은 모두 버리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낡은 것은 낡은 것대로 보존하고, 새것은 새 것에다 보존을 해야 둘이 다 보존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인은 모든 것에 주인이시기 때문에 결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종들은 반드시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주인이 어떤 법을 지키라고 지시했다면, 종들은 반드시 그 법을 지켜며 살아야 한다. 만약 자신은 그 법을 따라 살 수없다고 한다면, 그는 이미 주인하고 맺은 약속을 위반하게 되므로 그에게는 언약 때 맺은 약속대로 그에 따르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 반드시 언약 즉, 약속을 맺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아래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약속을 어긴 자들은 모두가 잔혹한 형벌을 당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똑똑히 보아왔다.


이제 이것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이방백성들하고도 언약관계는 지속된다.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된 현재의 이방백성들도 모두가 예수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아들이 오시기 전까지, 당신께서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이방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따라 살 것을 명령 하셨다. 이방백성들 또한 종들의 지시를 받아서 열심히 법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했던 자들은, 주인이 오실 때 주인 앞으로 인도를 받아서 '의'에 길로 들어서게 되겠지만, 법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자들에게는 주인에게 인도 되지도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동안 숨기고 있던 죄악만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종들이라도 계명을 지키며 살고자 노력했던 자들은 주인에게 인도를 받아서, 주인께서 오시면 그들을 온전케 하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법을 지키느라 금식하며 법에 따라 온갖 일을 행하며 살았지만, 이제 주인이 오셔서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실 것이므로 그들은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것을 낡은 부대에 비유하였고, 당시 율법 아래서 살던 자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이, 새 부대에 담겨지게 될 새 포도주로 비유하여 말씀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이방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게 된다. 이방인들이 지금까지는 성령 아래서 살면서 주님 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이방인들이 성령 아래서 살았단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이방인들이 죄 아래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율법 아래서 살던 자들에게 율법의 완성자로 예수께서 오셔야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었듯이, 성령 아래서 살던 이방인들 역시 영적인 백성답게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 오셔야 비로소 온전케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될 수 있다”라고 하신 말씀을 여기에 적용시켜보면, 성령 아래서 살던 때를 낡은 부대로 비유할 수 있고, 이제 예수께서 당신의 종을 통해서 새롭게 오시는 것을 새 포도주와 새 부대로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이방인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방인 가운데 오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믿지 않게 되면 그는 주님과의 피로 맺은 언약을 어긴 것이 되므로 마지막 때에는 잔혹한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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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1-11 20:53
조회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