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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주일 낮 설교

본문: 창세기18:16-33

제목: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들이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인간들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인간의 죄악이 관영하여 도저히 그 죄악에서 돌이킬 가능성이 없을 때만 심판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려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또 인간들 생활 속에 여러 가지 깨달을 만한 징조들을 주어서, 인간들을 하여금 악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중에 영생의 길에 동참케 하시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죄악으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다면, 이 세상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단 한 명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인간은 모두가 죄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그 때 당시에는 대단히 발전되고, 번성한 도시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흠모에 대상이었겠지만, 도시가 발전된 만큼 인간의 욕구도 그 만큼 높아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삶의 질 또한 대단히 큰 것을 요구하게 되고, 따라서 그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라가는 것이 인간의 죄악이다. 성경에 기록 된 것으로 내용으로 당시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는 악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곳에 조카 롯이 살고 있었는데, 이제 그곳을 멸하시겠다고, 주의 천사들이 그곳을 향해서 떠날 때, 아브라함으로서는 보통 걱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조카 롯을 구해보고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렵니까? 하는 질문을 시작으로 하여, 만약에 그 성중에 의인 오십 인이 있을 지라도 그곳을 멸하시렵니까? 혹시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여 주시렵니까? 아브라함의 이 말은 지극히 계산적인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기 전이기 때문에 당연히 육신의 생각이 그를 지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일방적으로 소돔 성을 멸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서 ‘의인’ 오십 인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묻기를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아브라함의 말이 괘씸하고 가소롭게 들렸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그런 것을 따져 묻지 않으시고, “좋다!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 의외로 쉽게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이 나오자,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란 것이다. 아브라함의 계산으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일방적으로 멸하시는 줄 알고, 의인 오십 인을 내세워서 하나님의 공의를 시험해 보았는데, 의외로 하나님께서 ‘의인’ 오십 명만 있어도, 그 의인 오십 인을 인하여, 소돔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간단히 물러서지 않고, 그래도 하나님한테 그런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했던지, 이번에는 “오십 의인 중에서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성을 멸하시리이까?” 하고 묻자,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십오 인을 찾으면 내가 멸하지 아니하겠다.”고 간단하게 대답해 버리시는 것이었다. 아브라함 이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놓고 질문을 하는 것이다.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 대답은 역시 “내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로 간단히 대답을 마치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대답이 너무도 쉽게 나오자, 자신도 뒤로 물러설 수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 그러나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겸연쩍은 얼굴로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어떤 시험을 걸어와도 자신이 있으셨기에 이번에도,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하시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의 생각을 단숨에 꺾어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그러실수록 아브라함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끈질긴 육신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래도 하나님께 따져 묻는 중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느꼈는지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십 명만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단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을 느끼고, 이제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말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체면과 육신으로 살아온 지난날의 모든 삶을 걸고 말씀드리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런 뜻도 담겨 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정말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라면, 아브라함도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공으로 우심과 선하심을 믿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말씀드린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 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똑 같은 말씀이시다.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인간의 끈질긴 육신의 소욕이 하나님을 시험해 보았지만, 결국 인간의 참패로 끝나고 말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결 같지만, 사실은 인간을 사용하는 사단과 하나님의 대결이라는 점이 우리들을 소름끼치게 만든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은 언제나 벌만 내리시고, 심판만 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비쳐지기 쉬우나,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 나면, 하나님은 심판 하시기를 즐겨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죄악 속에서 나와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쩔 수없이 인간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그 죄악 된 길로 들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심판으로 멸하시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인간을 가만히 있는데, 멸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가만히 나두어도 모두 지옥으로 가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나서서 인간들을 멸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고자 한 것도, 그들의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죄악이 다른 나라 다른 지방으로 전염되는 것을 막아 보고자 그 성들을 멸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오늘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던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있을 때, 끝까지 하나님의 공의를 시험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불합리한 분으로 몰고 가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단 한 명만 살고 있어도 결코 인류를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공의 앞에 인간의 죄악이 결국 무릎을 꿇게 된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간 중에 ‘의인’은 없나니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롯이 소돔성에서 구원받은 것은 롯이 의인이라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롯이 소돔 사람들보다 조금 덜 타락 되었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져 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오늘 현재 우리들도 우리가 결코 잘나서 이곳에 와서 주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돌들로도 사람을 다시 만들 수도 있고, 또한 우리들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데려다가 주의 일꾼을 삼으실 수 있다. 아직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사랑을 베푸시는 가를 몰라서 그렇지, 알고 나면 모두가 까무러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더러운 인간이 자신을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없듯이, 인간의 죄악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게 되면 비로소 그때서야 자기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듯이, 인간 또한 빛 되신 주의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야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주의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시기까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닫기 위해서는 강단의 주의 종을 통하여 말씀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마음속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 말씀만이 자신의 마음속을 비추어 주는 밝은 등불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떠나서는 결코 자신의 죄악을 깨달을 수가 없다.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결국 주님을 믿을 수가 없게 되니, 이 또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강단의 지적을 받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그것이 후에는 자신을 가장 많이 깨닫는 일이 되어서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가장 감격,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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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2-08 20:55
조회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