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믿음의 일꾼들!

주일 낮 설교

본문: 히브리서11:17-40

제목: 믿음의 일꾼들!


성경에는 믿음의 일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 믿음의 일꾼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은, 그 사람들을 자랑하려고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환경과 어떤 역경을 딛고 믿음으로 달려 나왔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런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것을 보고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또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더 믿고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하나님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은 더욱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성경에 믿음의 인물들이 많이 나열되어 있더라도, 내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말은, 믿음의 인물들이 어떻게 그런 환경과 역경을 극복하고 나왔는가? 하는 과정을 터득하라는 것이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터득하게 되면, 나도 나 자신의 환경을 살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환경은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 하고 전혀 다를 수가 있다. 그들보다 나의 현재 환경이 더 낳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고, 바로 믿음이다. 확실한 믿음만 있다면 환경 따위는 나를 결코 붙잡아 둘 수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믿음을 갖기가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믿음은 결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 말씀이 나에게 경험되어져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내가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한번도 말씀에 의지해서 순종해보지 않는 내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말씀이 자신에게 경험되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살아 계심을 믿는 다고 말하는 자들은 대부분 이론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기 때문에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게 되면 단번에 그 집이 무너지고 말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란 나 자신을 버리고, 나 보다 더 크고, 나 보다 더 낳은 분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만이,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논리로는 절대로 자신에게 설득력이 부족하다. 자신이 자신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자신을 설득할 수없게 되면, 항상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고 다니는가? 하는 의문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러다보면 강단에서 말씀하는 것도 그렇고, 또 순종하라는 말씀도 그렇고, 매사에 어쩔 수없이 끌려 다니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어쩔 수없이 끌려 다니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끌려 다니는 사람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하기 싫어도 지옥 간다고 하니까 어쩔 수없이 해야 하고, 또 그만 두어버리자니, 더 큰 형벌이 따른다고 하니 그만두지도 못하겠고, 이러지도 못하겠고, 저러지도 못하겠고, 정말로 죽을 맛인 것이다. 


그럼 왜! 이런 문제가 왔는가?

그것은 인간이 인간자신을 먼저 잘 알지 못하는데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존재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악한 영에게 철저하게 속아서, 인간은 고상하고, 인간은 지식이 넘쳐나고, 인간의 선하고, 인간은 아름답고, 인간은 부드러운 존재로만 알고 있지, 인간이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욕심꾸러기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없이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 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알려주니, ‘그래! 그거 좋은 거로구만!’ 하고 겉으로만 믿는 다고 말할 뿐이지, 그 마음속으로는 전혀 믿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믿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해야 옳은 말인 것 같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고 신앙생활 하라는 것이다. 자신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 스스로는 자신이 누구인가 절대알 수 없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을 볼 수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먼저 빛의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의 조명을 받다보면, 그동안 어둠에 숙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금방은 앞이 안 보일지라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렴풋이 사물이 눈에 보이게 되듯이, 인간 또한 빛의 조명을 통해서 금방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인간 또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된다고 바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을 어둠 속에서만 살다가 난생처음 빛을 보게 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둠만이 전부인줄 알고 살다가, 이런 빛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이번에는 빛에 대한 혹이심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마치 문명이 차단된 미개인 지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문명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컴퓨터를 그들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그들이 처음에는 ‘이것이 뭐에다 쓰는 물건인고!’ 하며, 혹이심을 느끼다가,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아! 우리 말고도 이 세계 어딘가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면서 과연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런데 그들이 쓰고 있는 제품을 보니까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르네!’ 하면서 문명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듯이, 인간 또한 빛의 조명을 받다보면, 자신의 어둠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빛에 대한 동경심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빛에 의하여 자신의 어두움이 속속들이 하나 둘씩 벗겨질 때마다, 육신의 창피함과 고통은 따르겠지만, 점차적으로 빛을 더 좋아하게 되고, 급기야는 어둠을 벗고 빛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어둠 속에서 살 때는 어둠이 최고이며, 어둠만이 삶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왔지만, 빛이 들어온 후부터는 어둠은 가장 더러운 곳이요 가장 추악한 곳이요 저주와 죽음과 고통이 있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빛에 대하여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빛은 어둠과는 정 반대로 가장 깨끗한 곳이요 생명이 있는 곳이요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임을 알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제 빛을 맛본 이상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빛을 향해서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다려 나가는 신앙생활의 참 모습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일꾼들은 바로 이렇게 하여 빛 앞으로 달려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역시 이런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빛 앞으로 나아갈 수없게 될 것이다. 빛을 통해서 반드시 자신이 어떤 존재란 것을 깨닫고, 자신을 깨달은 사람은 내가 왜! 빛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하는 것을 자신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하겠다.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게 되면, 계속해서 자신이 자신에게 설득당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제 자신의 개성(스타일)에 맞추어서 하나님 앞으로 달려 나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부산이나, 목포에서 10명이 똑 같이 서울을 향해서 출발했다 해도 모두들 똑 같은 방법으로 서울에 도착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걸어서, 어떤 사람은 뛰어서,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면서 서울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남들이 저렇게 하니까 나도 저렇게 해야 하겠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 사람은 뛰는 것이 좋아서 뛰면서 가는데, 나도 저 사람을 따라 가려면 뛰어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여, 자기 주특기도 아닌데  꼴사납게 뛰어 간다고 흉내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면 그나마 자기 페이스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 허둥대게 되고, 목표를 잃게 되면, 그때부터 남들 눈치나 보게 되고, 괜히 이 방법이 좋을까 저 방법이 좋을까하여, 이리 저리 쫓아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끌려 다니게 된 다는 것이다. 내가 어둠 속에서 나와서 빛을 향해서 달려가는데, 목표는 단 하나, 주님 앞에 도착할 때까지 달려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난 다음부터는 자신의 개성에 맞게 달려 나가라는 것이다. 남의 흉내 내지 말고, 남의 흉내를 내겠다는 것은 자신의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런 흉내를 내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일꾼은 바로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만들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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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2-15 20:56
조회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