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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누가 자신을 얼마나 잘 깨닫고 있느냐?

주일 낮 설교

본문: 마태복음5:17-20

제목: 누가 자신을 얼마나 잘 깨닫고 있느냐?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이요 생활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살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 법을 쫓아 살지 말고, 또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생각대로도 살지 말고, 오로지 율법을 따라 살면서, 때마다 선지자들이 들려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죄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달려 나가서 구원에 이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런 구원의 생활이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긴 하였지만, 적어도 말라기 선지자 때까지는 계속 되었다. 그러다가 애굽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 약20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을 포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제사방법은 이방인들이 하던 방식대로 돼지머리와 돼지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에 의하여 더럽혀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이때를 끝으로 하여 활동을 멈추었다. 다니엘은 벌써 이런 사실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이미 B.C 약600년경에 예언했고, 다니엘의 예언대로 이것은 모두 사실로 이루어 졌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믿는 사람들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한번 선택한 백성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믿음 때문이다. 이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선택한 자기 백성 즉, 당신의 자녀들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며, 어디까지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일반백성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차이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해 주신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인간들 속에 안일함이 생겨서 하나님은 너그러운 분이시니까 조금 잘 못해도 봐 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잘 못을 저지르게 되고, 한번의 잘못이 두 번을 낳게 되고, 두 번의 잘못은 또 다시 세 번을 낳게 되면서, 중간에 끼인 죄악의 담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백성은 절대로 버리시지 아니하고, 반드시 우리를 다시 찾아와 줄 거야! 하고 기다려 보지만, 죄의 삯은 사망인지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대가로 심판(벌)을 내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에피파네스 같은 포악한 이방인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도록 허용해 버린다는 것이다.


믿는 백성들이 바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무조건 하나님 이름만 부르고 있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된 줄 알고, 안일함에 빠져서 제 멋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아니! 감히 이방인주제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혀!’하고는 눈에 쌍심지를 키고서는 그들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허락 하에 들어온 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꼴이 되게 되어서, 더욱더 그들은 고통만 따르게 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왜! 우리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깨달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덮어두고, 무조건 눈앞에 펼쳐진 일만 갖고 따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들이 자신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서 오는 영적인 어두움이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이상 선지자들을 보내 주시지 않았던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렸다고 하는 증거다. 버림받은 그들은 이제 율법의 행위만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는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결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버림받은 그들이 율법을 통해서 해야 할일은 오로지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더 의로워져 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선지자가 끊어졌다는 것은 하나님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은 믿음도 없이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하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그동안 너희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나아갔지만, 이제 내가 그것을 한꺼번에 모두 이루어 주러 왔다’ ‘그러니 이제는 나를 믿고 나오너라!’ 그리고 ‘너희들이 잘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을 따라서 살지 않은 자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없고, 또 선지자의 말씀을 잘 듣지 않은 자가 믿음으로 나아 갈 수 없듯이, 이제까지 너희들이 선지자도 없이 율법의 행위로만 살아왔는데, 그것을 내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더욱더 굳건히 세우기 위하여 이제는 완전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믿고 나와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런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대로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모두 그대로 재현 될 것이다. 이방인들 역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먼저 성령을 보내 주시고 또 그들을 믿음으로 잘 이끌어 가도록 성령의 감독자를 세워서, 이방인들이 세상풍속과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과 성령의 감독자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해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이방인들 역시, 처음에는 못 먹고, 못살게 되니까 교회에 나아서 부르짖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또 성령과 성령의 감독자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믿음으로 잘 나가더니만, 점점 생활이 나아지고, 먹고 살만해지니까 게을러지기 시작하면서, 세상과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살게 되더라는 것이다. 성령의 감독자 역시 그런 성도들을 호되게 나무라서 그러지 못하게 해야 할 텐데, 그들 역시 늘 가난하게만 살아오다가 물질이 풍부해지자 성도들을 호되게 야단치기 보다는 적당히 눈치보고, 인정에 호소하는 말씀을 전하게 되다보니까 자신도 모르사이 인본주의 목회를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죄악의 대가로 그들에게 혼미한 영을 보내서 말씀이 쑥물을 되도록 해 버리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 역시, 누구도 온전한 신앙생활 즉, 믿음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없어지게 되었고, 오직 행위로 하는 신앙생활만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이방인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믿음도 없이 자꾸만 행위로 무엇을 얻으려하고 있고, 또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방인들이 마지막 살아남기 위해서는 장차 오실 아들을 믿기 위해서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악을 깨달아야 할 텐데, 그런 것들은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어떤 행위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는 것이 큰일이다. 50~60년대만 하더라도 성령이 충만한 목사님들이, 왜! 30~4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모두 맥을 못 추고, 모두 세상풍조에 끌려 다니면서 성도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한마디로 세상풍조와 육신의 소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졌기 때문이며,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진자는 이미 버리셨다는 증거다.


이제 이방인들이 마지막 살 수 있는 길은 달리 방도가 없다. 오로지 이방인 가운데 영으로 오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지금 우리 성도들이 훈련하고 있는 모든 과정이 바로 영으로 오실 주님을 단번에 믿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자신의 죄악을 자신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하는 일이 죄악인 줄 모르고 살아왔지만, 이곳 강단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았을 때에 느끼는 죄악과 또 강단의 뜻대로 살았을 때, 느끼는 죄악의 정도의 차이를 분명히 자신들이 느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의 차이를 발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자신의 죄악을 보고,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라고 하면, 왜!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왜!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서 자신이, 자신 스스로를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만 깨닫게 되면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수가 있다. 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을 깨닫고 있는 자는 항상 그것을 하나님과 연관지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는 그만큼 어두움이 자신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와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대적하게 되어서 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세우려 오시는 주님께서 자신을 잘 믿게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 자신들이 누가 얼마만큼 자신을 잘 깨닫고 있느냐? 하는 것에 최고의 관심사가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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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2-22 20:57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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