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일 낮 설교

본문: 마태복음9:9-13

제목: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여호와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우상숭배지역)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먼저 그에게 은혜를 입혀 주시고 그를 하나님 벗이라 칭하여 주셨으며, 그에게서 태어나는 자들을 이스라엘(하나님) 백성삼아 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율법 아래 살게 하셨다. 율법 아래서 산다는 말은 육체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어기게 되면 어김없이 육체에 병이 들게 되었고, 그것을 사함 받게 하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 그 고기는 번제단 위에서 태워드리고, 피는 재단 뿔(번제단위 사각에 난 모서리부분)위에 바르고 육체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다. 짐승을 잡을 때는 본이들이 직접 집에서 기르던 것을 가져와서 잡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기 집에서 직접 기르던 짐승이라야 더 애착이 가서 짐승이 죽을 때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악의 아픔을 더욱더 느끼도록 하였던 것이다. 짐승을 잡은 후에는 고기와 피는 모두 제사장들에게 주어서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런 일을 도맡아 하게 하였다. 그들에게 율법을 따라 육체로 이런 일을 오래 동안 하게 하였던 것은 오로지 그들을 아들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 앞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심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려 오시는 분이신데,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는 인간 쪽에서 반드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이란 마음속에 죄를 가지고 있는 자를 죄인이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죄악을 보고 죄인이라 하지 않고, 육체로 지은 죄만을 가지고 죄인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아들과 계속해서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쉽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먼저 육체로 그것을 예행연습 해 보도록 했던 것이 바로 율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육체의 죄를 깨닫고, 그걸 성전에 나가서 짐승을 잡아, 그 고기와 피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죄를 대신하였다하여 점점 의로워져 가고 있었다. 물론 율법 아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육체가 의로워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육체가) 영생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영생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영혼 속에 들어있는 죄가 해결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율법 아래 살던 자들은 바로 이 부분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셔서 그것(육체)으로는 어느 누구도 영생에 이를 수 없다고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의 거룩함만을 주장할 줄 알았지 도무지 예수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았다는 바리새인들은 사사건건 예수의 말을 트집 잡으며, 자신들의 주장(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다)이 옳다고 우겼지만, 그들이 우기는 것은 순전히 육체에 관한 것이요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것은 그들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지적하신 것이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는 자들 외에는 누가 더 옳았는지 잘 모를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누가 더 옳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제 이와 같은 일은 현재 성령 아래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이방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 아래 살고 있는 것을 모두 온전한 생명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것은 절대 오산이다. 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쉽게 설명하자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 아래서 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서 살고 있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던 율법은 육체로 지키던 법에 비하여, 오늘날은 성령의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은 영적인 백성답게 성령을 따라서 마음속의 죄악을 다스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성령 받은 것이, 곧 마음속에 생명이 들어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이방인 어느 누구도 마음속의 죄악은 돌아보려하지 않고, 오직 육체로만 거룩함에 이르려고 온갖 위장전술을 다부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육체로 그렇게 거룩함에 이르고도 영생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안 다면, 기독교인들 역시 그것이 전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건만, 마음속이 온전치 못하다보니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육신으로 별라별 위장을 다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허구에 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가를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서 영적인 하나님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아직은 영적인 아들을 만나본적이 없으므로, 마음속의 죄악을 깨달아가기 보다는 성령 받은 것을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여 육체로 거룩해 지려는 온갖 노력들을 다 기울이고 있겠지만,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서 마음속의 죄악을 지적해 줄 때, 그것을 받아들여서 시인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아들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 마음속의 죄악을 깨닫게 해 주거나 아니면, 지적을 해주실 때,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으로 나아가겠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 설교 제목에서처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시듯이 오직 죄인만 아들 품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자신을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죄인으로 인정하지 못해서 온전함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말씀이라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복 중에서는 최고의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축복을 눈으로 바라보고만 가만히 앉아서 구경하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쫓아가는 사람이 더 복 받은 사람이요 그 축복을 손아귀에 움켜쥐는 사람이 더 축복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 눈앞에 놓여있는 최고의 축복을 붙잡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세상속의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재능으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나라의 영생은 1%의 나의 노력(나는 죄인이요)과 99%의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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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7-11 19:29
조회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