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주일 낮 설교

본문: 히브리서11:1-16

제목: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벨이 그렇고, 에녹이 그러했으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요셉과 모세와 다윗도 믿음의 인물들이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의 예표로 사용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를 베풀어서 악을 제거한 상태였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고 주님을 믿는데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수월 할 수는 있었다고는 하나, 아무튼 자신의 생각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하나님만을 믿고 행동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위와 같은 자들에게 은혜(악을 제거)를 베풀어서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은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앞으로의 일들을 진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뒤 따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자신들의 생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들 생각대로 사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율법까지 주었던 것이다. 율법은 그들에게 자기들 멋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굴레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조상들이 믿음으로 살아온 것을 보면서도 자기 조상들이 보여준 믿음의 본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고, 율법만 지키면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 줄 착각하고, 율법을 지키고 사는 데만 주력을 했다. 율법만 지키고 사는 것은 육체로 종교적인 행위는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율법도 중요하지만, 사실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율법이 있기 전에도 구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과 믿음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고 상호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율법이 육체로 범죄 하는 것을 다스리는 법이라면, 믿음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율법만 지키고, 다시 말해서 육체로 죄짓는 것만 다스리고, 마음에서 올라오는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을 차단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들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육체로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은 마음에서 나오는 법이고, 율법은 육체 즉, 몸 밖에서 주어진 법이다. 따라서 믿음은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법인데 반하여 율법은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몸 밖에서 죄를 깨달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어진 법에 따라서 연례행사처럼 그것을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가령, 십일조를 하라고 했으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법에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이고, 법에서 무엇을 하라고 했으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부분을 혼동하고 착각한 나머지 예수가 그들 땅에 오셨을 때, 그를 믿지 못하고 멸망으로 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아들을 직접 보내주신 것은 믿음도 없이 율법(육체의 법)만 지키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모두 거부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이런 일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법에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가고, 십일조를 드리고, 모든 예배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 드린다하여도 그것은 성령의 법에 따라서 영적인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지, 그것이 결코 믿음이 될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도 믿음을 가지려면 자신의 생각 속에서 올라오는 모든 생각들을 차단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성령 받은 것만 자랑하지, 성령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뜻대로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성령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의 뜻대로 살려면 반듯이 자신의 생각들을 꺾어야 한다. 그리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온전히 성령을 따라 살 수가 없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꺾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잡다한 생각들은 다 하면서 그것이 성령이 주는 생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 기독교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포함한 모든 의식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이지 믿음이 아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의식들이 믿음으로 변하려면 반드시 인간의 생각을 차단하고 드리는 예배라야 그것이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방인들이 자신의 생각이 어디까지가 인간의 생각이고, 성령이 주시는 생각이 어디까지가 성령이 주시는 감동인줄을 모르는데, 무슨 수로 자신의 생각과 성령의 감동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 주시게 된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믿음도 없이 법을 따라서 영적인 백성으로서 그것도 육체로 의무를 다하는 데에만 열중했지,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고 성령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에 이르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아들을 믿으려면 자신의 생각을 차단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온전히 아들을 믿을 수 없다. 법을 준행하는 것이야 교회 나가서 법에 따라서 행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들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생각을 꺾어야 아들을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아무나 섣불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법아래 사는 사람과 믿음아래서 사는 자의 차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저렇게 쉽게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가 영적인 백성으로서 하나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 여러분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아들)을 믿으라고 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믿겠냐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 바보가 되라는 소리다. “똥을 된장”이라고 말하는데 세상사람 누가 우리들을 보고 바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사는 삶이 아닌 이상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해도 좋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성령 아래 살면서 법대로 교회에 나가서 온갖 의무도 다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으려고 보니까 자신의 판단과 생각 때문에 도저히 그를 믿을 수 없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온전히 믿기 위해서 부득이 나의 생각, 나의 판단을 모조리 내려놓고,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알고, 오직 그만 믿고 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믿음만 있다면 자신 앞에 어떤 난간이 가로놓여 있다하여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그 난간을 뚫고 나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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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7-25 19:31
조회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