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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말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추석 명절 예배 
본문: 마태복음11:1-15 
제목: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본문은 침례요한이 헤롯의 일로 인하여 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묻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시작 된다. 사실 침례요한은 하나님 계시로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 아들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이 침례요한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바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섞여서 누가 하나님 아들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침례(물로 씻는 의식)를 통해서 물에서 올라올 때, 어느 누구에게 성령이 임하는가를 보고, 성령이 임한 그가 바로 하나님 아들임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공포하는 하는 역할을 맡아서 했다하여 침례요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그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아래 살고 있다는 그것으로 모두가 의인이 되어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과 율법사, 서기관, 제사장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며 회개를 외치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방에서 침례를 받으러 요한 앞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의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침례만 받으면 모두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은 물에서 올라올 때 그에게 성령이 임해야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요한은 미리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당시 침례를 받던 자들은, 자신들은 거룩한 백성이니까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자신들에게도 성령이 임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몇 백 명, 몇 천 명이 줄을 지어 물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어느 누구에게도 그들 머리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지 못한 침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는 말씀으로 독설을 퍼 붓는다. 

요한이 그들에게 독설을 퍼부은 이유는, 너희들이 정말로 아브라함처럼 믿음 있는 자손이라면 너희가 침례를 받고 물속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너희 머리위에 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 머리위에 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독사(사단)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 지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해 물로 침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말하며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줄 것이다"하고 뒤에 오시는 예수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그 후 침례요한은 예수가 그 앞에서 침례를 받으려 하자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하며 비록 육신적으로는 예수가 요한의 이종동생이었으나, 성령께서 요한의 눈을 열어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니 요한이 예수에게 허리를 굽혀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예수는 그러한 요한의 겸손함을 배제하고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말로 요한에게 침례를 줄 것을 요구하자, 요한이 그 즉시 예수에게 침례를 주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의 머리위에 임하는 것을 본 침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며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선포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 아들로 선포한 요한이라도, 헤롯의 일로 지금 옥에 갇혀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예수에 대한 여러 가지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니까?"하며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예수의 대답은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35:5-10 말씀을 인용해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만 말하라고 일러준다. 그러시면서 결정적인 말씀으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예수 자신으로 인하여 실족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려 오신 분인데, 왜 자신으로 인하여 실족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 이유는, 결코 인간의 생각으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한 말씀이며, 또한 지나치게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 아들에 대해서 알려고 했다가는 영락없이 실족하게 될 것이란 말씀이기도 하다.

당시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가 누군가에 대하여 알려고 찾아왔지만, 예수가 누구인가 알기는커녕 도리어 의문점만 더해 가지고 돌아 간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예수에 대하여 알 수 없었는가 하면 당시 그들은 율법 아래 살고 있었다는 것이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볼 수 없도록 만든 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나쁜 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율법이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못 알아보도록 만든 것은 그들이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보면 저마다 신앙이 제 각각이다.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사람이 있다. 왜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모두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신앙이 제 각각일까? 그들 말대로 아직 성화가 덜 되어서 그러는가? 아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아직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온전해 지려면 기독교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 오셔야 한다.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구심점 역할을 해 주셔야만 이, 그 아들을 통해서 기독교인들 모두가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앞에 보내지는 하나님 아들 역시 아까 이사야(35:5-10)가 예언했던 그 하나님 아들이다. 예수께서는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을 때,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말씀(마11:5)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시킨 그 말씀들을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성취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이 하시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 아래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 수 있는데, 영적인 백성들에게는 소경이 없는가? 또한 앉은뱅이는 없는가? 문둥병자는 없는가? 귀머거리는 없는가? 죽은 자는 없는가? 가난한 자는 없는가? 영적으로 보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영적인 병을 앓고 있는 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충만한 부흥강사나, 또는 성령의 은사로 사역을 하는 목사들을 보면, 몸에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고쳐주는 사람들은 많이 있어도, 영적인 병(마음속으로 앓고 있는 병)을 고쳐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가령, 귀머거리가 있다면 육신적인 귀머거리는 고쳐 주는데, 영적인 귀머거리(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자)는 누구도 못 고쳐 주고 있다는 것이다. 소경 역시 마찬가지다. 육신적인 소경의 눈은 뜨게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소경의 눈은 뜨게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문둥병자도 마찬가지이며, 또한 죽은자 역시, 실제로 육신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사람은 있어도 영적으로 죽은자를 살리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 말씀이 갈급하여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있어도, 올바른 하나님 말씀이 없다보니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듣지를 못하게 되어 더욱더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해소해 주시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아들을 보내서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만약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만 찾다가는 자신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아래 살면서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를 믿어야 온전해 질 수 있었는데, 예수는 배척하고 여호와 하나님만 찾다가 결국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그들을, 율법이 자신을 싶판대 위에 세우는 꼴을 당하고 말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 아래서 살면서 성령의 완성자로 오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배척하고 자꾸만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이름만 부르면서 성령 받은 것만 자랑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그것 때문에 성령께서 기독교인들을 심판하고 말게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 어느 누가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았는가? 자신 있으면 어느 누가 대답해보라! 성령을 따라 살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믿음에서 넘어졌다는 말이다. 믿음에서 넘어진 자들을 다시 살려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 주시는데, 그 아들을 배척하고서야 무슨 수로 기독교인들이 온전해 질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아들을 믿지 않게 되면,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그것으로 인하여 모두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아들을 강제로 믿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했거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아들을 믿어야 온전함에 들어갈 수 있고, 자신이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았다고 믿거든 아들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인간으로서는 율법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없었듯이, 성령 또한 인간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온전히 따라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살지도 못할 성령을 왜 이방인들에게 부어 주셨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할자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방인들 모두가 죄인인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기독교인들 역시 자신이 죄인인것을 깨달아야 결국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아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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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09-28 19:38
조회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