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일 낮 설교 
본문: 마태복음19:16-22 
제목: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어찌 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러자 이 청년이 하는 말 "어느 계명입니까?"하고 아주 당당하게 말한다. 이 청년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은 이미 율법에 기록된 모든 계명들을 모두 다 지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다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내가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청년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하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율법에 기록된 계명들을 모두 잘 지키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누구도 영생에 이를 수가 없다고 했으니, 이 청년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육신의 법)만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생에 이르려면 그도 결국 하나님 아들을 믿고, 아들로부터 긍휼을 입어야 영생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자신이 율법에 기록된 계명들만 잘 지키면 그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 하에, 예수를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더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 청년이 지킨 율법은 육체에 한정된 법으로서, 아무리 그가 율법에 기록된 계명들을 모두 훌륭히 잘 지켰다 할지라도 그것은 육체로 행한 법이지, 마음속으로 지킨 법들이 아니다. 가령, "부모를 공경하라"했다면 그것은 육신적으로 부모를 공경한 것이지 마음속에서부터 보모를 공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청년 입장에서는 육신적으로 한 그것이 계명을 지킨 것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온전히 부모를 공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결코 영생으로 직결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마음이 부패한 인간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마음속에서부터 부모를 공경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설사, 어느 누가 부모를 잘 공경했다 할지라도 613가지나 되는 율법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어기게 되면 그는 모든 율법을 범하게 되므로, 비록 육체에 주어진 법이지만, 이것 또한 인간들이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신앙생활들을 몽땅 통 털어서 하나의 종교적 신앙행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절간의 중들도 아주 잘 수행하며 살고 있다. 그들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법도를 따라서 육체로 온갖 고행과 수행을 반복해 가며, 자신들은 무엇을 잘 지켰기 때문에 자신들은 극락왕생(우리로 말하자면 영생)할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하물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고도 영생에 들어가려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데, 절간의 중들이야 자신들이 만든 법도를 따라 육체로 온갖 고행을 거쳤다하여 영생이 주어질 수 있는 것들이라면, 율법 아래서 살던 유대인들은 단 한사람도 멸망 받아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잘 지키고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아들을 믿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갔던 사실들을 상기해 보면, 인간에게 영생을 얻는 일만큼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이 주어져 있음을 깨닫게 한다. 절간의 중들이나, 혹은 잘못된 이단들이 육체로 무엇을 지키며, 또는 무엇을 먹지 않았다하여 영생에 이를 것처럼 말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사단손에 붙들려 있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키고도 마지막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해서 결국 멸망으로 가고 말았는데,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이와 같이 일이 똑 같이 반복되어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에구! 바보 같은 넘! 그까짓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말씀을 거역해! 나 같으면 당장에 모든 재물을 버리고 예수를 쫓아가겠다!"하고 쉽게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현실이 정말로 내게 닥쳤을 때, 나는 과연 그 부자 청년처럼 그런 길로 가지 않겠노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럼 기독교인들이 과연 그럴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짚어보기로 하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모두가 성령을 받아서 그야말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 그런중에서 어떤 신실한 기독교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 앞으로 안내되어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나도 당신처럼 온전해 질 수 있겠습니까?"하고 질문을 하자, 듣고 있던 하나님 아들은 "네가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았더냐?"라고 말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네!"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이제까지 주일 예배에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또한 십일조를 빼먹은 적이 없을 뿐더러, 새벽기도는 물론이요 삼일 밤 예배, 금요철야, 그리고 교회에서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매주마다 고아원과 장애인 복지 시설을 둘러보며, 그곳에 나의 생활비 절반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직도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하고 묻자 하나님 아들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그러자 그때까지 당당하던 그 기독교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하나님 아들 곁을 떠나더라는 것이다. 

이 기독교인 또한 그 사람 입장에서만 보면, 아주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서 주일예배에서부터 시작하여 금요철야까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고, 또 교회에서 온갖 궂은일까지 도맡아 했다는 것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감히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그런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아원과 장애인 복지시설들을 둘러보며, 그들을 매주마다 찾아가 위로했고, 그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비 절반을 그곳에 매주 보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세상 적으로 보면 감동과 찬사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 그가 지금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분 앞에서, 자신의 치적을 들먹이며 "영적인 하나님 아들이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나도 당신처럼 온전해 질 수 있겠습니까?"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성경에 기록된 말씀처럼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예배와 예물에 소흘함이 없었다는 것과 또 땅에서 이웃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계명들을 쫓아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다 했으니 영생이 있다면 당연히 나 같은 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하고 묻는 것이나 똑 같은 말이다. 그가 하는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생은 인간이 무엇을 했다하여 주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기독교인이 한 것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영생은 그가 그런 일을 했다하여 덥썩하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였어도 그것은 육신적으로 한 것이지 마음속에서부터 한 것이 아니며, 또한 고아원이나 장애인 시설을 둘러본 것도 순전히 육신적인 생각으로 한 것이지 그것이 마음속에서부터 사랑이 싹터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온전한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아들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주의 영이 임해야 비로소 그도 온전해져서 진실한 사랑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아들을 먼저 믿어야 비로소 그도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했다하여 아들에게 영생을 달라고 하면 그는 결국 댓가를 바라고 한 것 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가 한일은 결국 육신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본문을 통해서 가장 심오하게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이 교회에서 무엇을 했다. 혹은 자신이 무슨 직분을 맞고 있었다. 또는 자신은 한 번도 주일예배를 빼먹지 않았다. 실일조를 떼워먹지 않았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던 은사가 여러 가지 있었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큰 교회로 부흥 시켰다. 성도수가 많은 교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영생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분도 결국은 하나님이시요 또 영생을 주실 분도 결국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더러운 죄악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무엇을 했다하여, 혹은 무슨 직분을 맡고 있었다 하여 당연히 영생에 들어갈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어불 성실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본문을 통해서 심도 있게 깨달아야 할 것은, 자신이 이 땅에서 작은 직분을 맡고 있었던 자나 큰 직분을 맡고 있었던 자나, 어떤 일을 했던 간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아들을 믿지 않게 되면 결국은 멸망으로 간다는 사실 하나만 제대로 깨닫고 있다면 누구든지 오만 불손한 자리에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육신 있는 일이 먼저 이루어 지고 그 다음에 신령한 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앞서 있었던 일은 뒤에 올 일을 예표하는 그림자요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영생에 들어가려면 뒤에 오시는 아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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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10-17 19:39
조회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