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외식으로 하는 신앙생활

주일 낮 설교 
본문: 누가복음13:10-17 
제목: 외식으로 하는 신앙생활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하시면서 외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께서 하시는 이런 일들이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못 마땅해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형식적인 법보다는 결과가 선한 것이라면 한번쯤 깊이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법도 중요하지만 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위를 달리다가 도로 반대편에서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을 목격하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유턴하여 사고가 난 차량에 접근하여 부상자들을 싣고 병원으로 급히 후송하여 죽어가던 사람들을 살려냈다. 이때, 법으로 따지면 이 사람은 면허정지에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 개인적인 자기 일이 아니고 죽어가던 사람들을 살려내고자 했던 일이기 때문에 법도 그에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 사람이 고속도로 법이 무서워 그냥 지나쳤다면 그는 법은 잘 지켰을지 몰라도 귀중한 생명은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비유가 성경에는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그중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당시 유대인들은 오로지 주어진 율법 아래서의 삶이었기 때문에 율법 안과 밖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 아래서 사는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으므로 법으로 주어진 일에 충실 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식일 날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보니 그저 안식일에 회당에 나와 성경만 읽으면 그것으로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느닷없이 나사렛 촌놈이 나타나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읽으라는 성경은 안 읽고,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에게서 귀신을 좇아내고 그를 낫게 하시니, 그것을 보고 있던 회당장이 안식일을 여겼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얼마나 형식과 외식에 물들어 있는 신앙인가? 결국 이 회당장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은 사람이 죽던지 말든지 법만 따지는 하나님이요 형식에 머무르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믿는 인간들에게 법을 먼저 주었던 것은 그 법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아들 앞에서 무릎 꿇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믿는 인간들이 법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꿇라는 무릎은 안 꿇고 아직도 법을 들먹여 가며, 법을 완성케 하러 오신 분 앞에서 도리어 법을 안 지켰다고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마치 주인이 뒤 바뀐 느낌이다. 

이제 이런 일은 현재 성령 아래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재현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어차피 인간은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오늘날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교회 제도들을 보게 되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침례교는 침례 받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주장하고 있는 것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볼 수가 있고, 또 장로교는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믿음관계를 따지고 있으며, 순복음 계열은 언제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구원을 논하고 있다. 그러나 물 침례도, 물세례도, 성령 세례도 모두 아직은 온전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행하고 있던 온갖 제도들은 실상은 하나의 예표로 주어진 것들로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들이 와서 성취시킬 일들이다. 

아까 예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귀신들려 꼬부라져 있던 한 여인을 사단 손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것처럼,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행했던 온갖 제도들을 아들이 오셔서 그것을 완전케 해 주신다는 것이다. 아들이 오시게 되면 물 침례도, 물세례도 모두 필요 없게 되고 또한 성찬식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하나님 뜻은 인간들을 온전케 하는 것이 목적이시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이 형식에 머물렀던 것에서 실제의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기독교인들이 건물의 웅장함을 보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 이라는 생각을 해왔다면 이제는 그런 편견을 버려야 하며, 또한 목사들의 외모나 유창한 말솜씨를 보고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속에 계시고 아들은 믿는 자들 마음속에 영으로 계시게 되니 그가 곧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자이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런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하시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행하게 되면 호리지차가 천리지차가 되고 만다. 농부가 겨우네 얼어붙었던 땅을 갈아엎고 봄에 씨앗을 뿌리는 것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얻고자 해서 씨앗을 뿌린다. 그런데 씨만 뿌려놓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고, 열매가 맺히기까지 농부의 피땀 어린 수고가 있어야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수천 년 동안을 이어오면서 인간 농사를 짓고 계시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뱀에 꾀임에 넘어가 모두 죽음으로 가게 되었을 때, 살려주는 영으로 하나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그 아들을 믿고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름실과로 거둬들이게 하시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을 믿고 나오는 자들을 가을 수확으로 거둬들이시게 될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형식적으로 하는 신앙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온전한 기준의 잣대가 없어서 그렇게 해 왔을지라도 아들이 오시고 난 후로는 온전함의 기준이 세워졌으므로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삶으로 살겠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더욱더 심한 고통이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 자들은 육신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루 빨리 형식에서 벗어나 진실로 아들 앞에 다가오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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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4-11-07 19:53
조회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