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나는 믿지 아니할 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오신 예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여러 가지 이적과 표적을 보여 주시고, 또한 눈먼 자와 앉은뱅이와 문둥병자와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며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고 나오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해 주셨다. 이것을 보고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왜 하필 안식일 날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며, 예수께서는 결코 내 자의 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속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나도 일한다고 분명하게 말씀 하신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은 모두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마음을 붙들고 쓰고 계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그것을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예수가 오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지자들이 사역을 나누어 맡아하였다.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들 마음을 붙들고 사용하셨기 때문에 온전한 사역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성령께서 선지자들 속에 내주 하셔서 그들 마음을 붙들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몸 밖에서 그들 마음을 붙들고 사용하셨기 때문에 선지자들을 한시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본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을 지라도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믿음은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에 비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는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예수의 영속에 내주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예수의 영속에 내주하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는 겉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한 청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오자마자 성령이 예수의 영속에 임하시게 되니, 예수는 그때부터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도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의 율례의식을 따라서 철저하게 율법 아래서 자랐다. 그도 태어나자마자 율법에 따라서 팔일 만에 성전에 나가서 할례도 받았고, 또한 유월절과 모든 절기도 꼬박꼬박 잘 지켰으며, 안식일에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물론이요 율법에 따라서 안식일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그런 그가 성령이 임하게 되자 자기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할례와 유월절과 안식일의 완성자의 모습으로 유대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때까지 예수를 평범함 청년으로 혹은 목수의 아들쯤으로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갑작스러운 그런 행동을 보고 무척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놀라던지 말든지 예수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갑자기 그렇게 행동하는 예수를 보고 믿으려하지 않고 자꾸만 시비를 걸어오자 “아버지와 나는 하나로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로 그들의 시비를 잠재우셨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유대인들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참람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에서야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고 성경을 읽으니까 그런가보다 하지, 우리도 당시 그곳에 있었다면 유대인들의 생각과 조금도 다를 봐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일은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맞이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그때 당시와 조금도 다를 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이라고 해서 이마에 “나는 하나님 아들이오!” 하고 표적을 달고 오시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기독교인들은 성령으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영적인 백성이라서 하나님 아들도 영적으로 오시기 때문에, 유대인들 앞에 오시는 하나님 아들마냥 사람들 눈에 특이한 표적도 안 보여 주신다. 그 아들 역시 사람들 눈으로 그의 겉모습만 보게 되면 기독교인들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아들 역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기존교회에 나가서 교회의 정해진 법에 따라서 세례도 받고, 또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권찰 직분과 집사직분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만큼은 기이한 일로 인해서 교회에 다니기 전에 먼저 성령 세례를 받는다. 이것만 빼고는 기존의 교인들과 전혀 다를 봐가 없는 것이다. 그 아들 역시도 그때까지는 평범한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목적은 장차 많은 돈을 벌어서 교회와 주의 종을 잘 섬기는 것이 그의 최대 목적이었다.

그런 그가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만 7개월을 넘어설 때에 그에게 놀라운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주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찾아오신 주님은 그날로 그의 마음속에 좌정하시면서 그를 움직여 가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시던 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시자, 그때까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던 종(아들)은 자신의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대로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가 첫 번째로 그의 계획을 변경하게 된 것이, 종(아들)은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볼 목적으로 정선 여량농협에 옥수수 판권을 계약하러 가려는 것을 주님은 그것을 당장에 포기하게 하시며 신학교 먼저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아들)은 자신의 생각을 접고 주님 뜻에 따르게 된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무수히 많은 인간의 생각을 접게 만들었고, 그 대신 주님은 당신의 뜻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셨다. 그때까지도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던 종은 그때마다 번번이 자신의 생각을 접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남들이 하는 대로 온갖 교회에다 치장을 다 해보기도하고, 또 남들이 기도 많이 한다하면 남에게 뒤 질세라 밤새워 기도하기도 하고, 누가 철야 많이 한다하면 죽자 사자 철야기도에 매달렸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무조건 기뻐하시고 교회가 막 부흥될 줄 알고 말이다. 그러나 종의 마음속에 오신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하나 깨닫게 해주셨다. 그래서 종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 둘씩 접기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현재 여러분들 앞에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종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은 종의 마음속에 오셔서 종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결코 종이 나서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이 지금까지 주님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 둘씩 접다보니 이제는 어린애들에게 과자 부스러기 하나 주는 것까지도 결코 종의 마음대로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 눈으로 보면 꼭 목사가 편파적으로 누구는 예뻐하고, 누구는 미워서 저러는 것 같지만, 절대로 인간 생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사, 사모 마음속에서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목사, 사모가 주님의 뜻대로 따라 움직여 가는 것이지, 만약에 목사 사모가 자신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죽도록 육신으로 충성하는 여러분들은 현재보다 몇 갑절은 칭찬만 듣게 될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여러분들은 목사, 사모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 앞에 오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생각을 꺾고 죄인으로 나오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자신의 생각을 꺾고 죄인으로 나오는 자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 외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주님으로부터 불쌍함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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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5-01-16 20:57
조회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