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마음을 담아 드리자!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중심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본문을 두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아벨은 양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라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뜻을 전혀 모르고 하는 무식의 소치다. 이때는 인간이 처음으로 세상에 첫 발을 내딛고 살아가던 때이므로, 인간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아주시기도 하고 안 받아 주시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물은 그 후에 드려지는 것으로서 결국 예물은 드리는 자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하는 마음을 담을 예물이 없으면 그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마음이 없이 아무리 좋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그 예물은 결국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물도 중요하지만, 예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보니 무조건 예수 이름으로만 드리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다 받아 주시는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하다보니,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셨고, 가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도 없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대단히 그럴듯한 말 같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로서, 꼭 봉사(맹인) 문고리 잡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이치로 생각해보더라도,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고 할 때 마음도 없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사다주고, 아무리 좋은 옷을 사다준다고 할 때 그것이 어찌 효도가 되겠는가? 설사, 자신의 형편이 넉넉지 못하여 값비싼 고기는 못 사다 드릴망정, 생선 한 마리를 사다 드려도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드린다면 그것이 곧 효도요 또 값비싼 옷은 못 사다 드릴망정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자신이 직접 짠 쉐타 한 벌을 부모님께 드린다면 그것이 곧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 자신만 보더라도 누가 나에게 선물을 해 주는데 한쪽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해 주고, 다른 한쪽은 마음도 없이 그저 형식에 치우쳐서 선물을 해준다고 할 때 어느 쪽에 마음이 더 쏠리겠는가? 하물며 세상 이치도 이렇다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야 그 사랑을 얼마나 더 요구하시겠는가?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 하여 자꾸만 영(靈)적인 분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하려하지 않고 자꾸만 말로만 주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시대는 인간이 처음 세상에 발을 내딛고 살던 때라,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에 있어서도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방법은 달라도 목적은 같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중심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중보자로 계시지 않던 시절이라 인간들 모두가 직접 하나님을 찾아 가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일 년 동안 애쓰고 힘써서 가꾼 것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그것들을 들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제물을 드리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어떤 제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잘 못 해석하는 사람들처럼 꼭 양으로만 드려야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열납하신다면, 그럼 다른 농사는 일절 짓지 말고 오로지 양치기 일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짐승을 기르는 목축업을 하는 자가 있으면, 농사짓는 농사꾼도 있을 것이고, 또 고기 잡는 어부도 있다는 것이다. 각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수확한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그때 제물을 드리는 자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멀리하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중보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영생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여호와를 믿던 유대인들은 반드시 인간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이름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이름을 믿고 영적인 백성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 이름만 계속 부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영생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마음으로 한번 예수를 믿어 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쉽게 예수 이름을 부를지 몰라도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 모두가 마음이 부패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도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보내서 그를 보고 인격적으로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까 예수께서 이방인 가운데 한사람 속에 영으로 오셔서 그를 보고 인격적으로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마음속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아들을 믿으려다보니 먼저 해결 받아야 할 것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이다. 마음속에서 죄악을 먼저 빼내야 아들을 마음속으로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악을 빼내는 것도 본인들의 마음을 실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남의 일처럼 지나가는 말로 “나는 죄인이요”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역시 주님 앞에 상달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 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은 모든 것이 마음중심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감사를 하더라도 마음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예물을 드려야 그것이 상달이 되고, 어떤 예물을 드리더라도 항상 마음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려야 상달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개를 하더라도 주님은 인간의 마음 중심을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마음중심에서 회개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도적질을 했다면 도적질 한 내 모습을 먼저 마음속으로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적질 한 내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몹쓸 짓인가를 마음속으로 구구절절이 깨달으면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그의 도적질 한 죄악의 마음을 받게 되어 그를 용서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이 회개를 한다면 어느 누가 더 마음속으로 회개를 찐하게 하겠는가? 당연히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와서 제물을 드린 아벨이 회개를 찐하게 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아벨의 마음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가인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회개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이유 역시 가인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제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역시 마음속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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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5-01-23 20:57
조회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