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죄인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느니라.

율법 아래서 온갖 율례의식을 행하며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바다를 건너서 험난한 여정길인 바란 광야를 거쳐서 무사히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것이 그들이 애굽을 탈출한 목적이듯이 말이다.

또 노아 이전세대 사람들은 인류역사가 처음 시작된 때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 그들이 바라는 최대 목적이었으나, 하나님 아들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섞이게 됨으로 말미암아 땅에서 타락을 가져왔고, 그로 인하여 땅에 죄악이 만연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지면의 모든 것을 홍수로 쓰러 버리실 때, 오직 당대의 의인이던 노아네 가족들만 겨우 살아남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바로 노아가 만든 방주가 그들의 피난처가 되는 것이다.

물론 시대마다 타락하는 과정이 조금씩 다르듯이 구원의 방편도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께서 첫 것을 주심은 그 다음에 오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말씀을 거역할 때마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면서 그것도 제1세대들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모두 죽고 제2세대들이 겨우 가나안 땅에 정착 했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그것이 결코 그들에게 주는 영원한 안식이 아니었음을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쯤에서 메시아가 왜 오셔야 하는 가를 알았어야 했으며, 또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것이란 것쯤은 지례짐작이라도 하고 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메시아를 맞이하고 보니, 자신들이 메시아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땅에서 잘 되는 것이요 메시아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죄인들만 요구하고 계셨으니, 인간과 메시아 사이의 생각의 차이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보다 못한 히브리서 저자는 3-4장에서 자기 조상들의 삶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왜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죽어가야 했으며, 또 죽은 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다가 그리 되었는가 하는 것들을 자세히 상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세가 당시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그도 그리스도에 비하면 사환에 불과할 뿐이었고, 또 모세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제2세대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하여 나눠주었지만, 그것 역시도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한 안식은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믿고 그를 통해서 얻는 안식이라야 진정한 안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히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영원한 안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사실을 조금만 깨닫고 있었어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예수님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있는 자의 하는 짓거리를 보면 꼭 하나님 앞에서 죽을 짓만 골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물론 당시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최상의 신앙생활 모습이었겠지만, 인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입장에서는 그들의 하는 짓거리를 볼 때 한심스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주신 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믿음에서 넘어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이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살려줄까 말까한 판국에 “뭐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참으로 기가 막일 일이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할 때 하는 짓거리들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고 있는 자들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일은 오늘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 또 유대인들이 무엇을 잘못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고, 또 유대인들이 무엇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천국의 주인을 배척하고 멸망으로 갔던가를 눈곱만큼만 깨닫는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대체할 수 있으려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목적을 보니까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비교해보니 전혀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육체로 하는 신앙생활이었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받은 영적인 백성들이다. 그런데 영적인 백성들이 유대인들이 육체로 취했던 모든 행위들을 그대로 따라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육체로 열심을 내고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모두멸망으로 갔던 사실을 깨닫는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백성답게 속으로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를 않다는 것이다. 모두가 유대인들처럼 육체로 거룩함만을 주장할 줄 알았지 전혀 자신의 마음속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다보면 결국은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여 주님이 보내시는 아들을 믿기가 거의 희박하다. 

천국이 바로 자기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기 딴에는 죽어라고 신앙생활 해놓고 결국은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여, 천국 문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하여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것처럼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대다수가 이렇게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 아들을 믿지 않았을 때 받게 될 심판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육체로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겪고 말았지만, 영적인 백성들이 영적인 아들을 믿지 않았을 때, 그들이 받는 고통은 그야말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앞에 펼쳐진 것을 보게 되면 뒤에 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 세대들의 타락과 구원 과정을 살펴보면서 장차 우리에게 닥쳐올 타락과 구원 과정을 미리 미리 준비하여 천국 문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못해서 낙오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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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5-02-20 21:03
조회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