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실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선고나 같은 말씀이다. 그 이유는 레위기19:18절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율법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씀이다.

그때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을 믿는 한 형제들이었지만, 이방인들은 모두 이방神을 섬기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따라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같은 너희 형제들끼리는 서로 사랑하며 지내되,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은 너희 원수로 여기라는 것이다. 조상대대로 율법의 가르침만 받고 살아온 유대인들에게, 오늘 예수께서 말씀 하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실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만약에 유대인들에게 이방여인과 결혼하라면 할 수 있겠는가? 율법에 이미 이방여인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그 율법을 어기고 어느 누가 감히 이방여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여인과 결혼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율법에 이방여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여인이 평소에 섬기던 자기 神들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남자)들이 여인의 유혹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도 이방여인을 따라서 이방神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죄의 온상이 되는 싹을 제거해 버리라는 것이다.

이방神은 당시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이간시키는 훼방꾼으로 일하고 다녔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과는 원수지간인 것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이런 이방神들을 섬기고 사는 자들을 멀리 하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이런 복잡한 과정속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예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아무리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해도 그가 하신 말씀들을 유대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자신들이 이방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마귀와 귀신을 섬기는 그들을 유대인들이 무슨 수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그들과 같은 죄인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율법으로 의로워져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절간의 중하고 결혼하여 살라고 하면 살겠는가? 당시 유대인들 입장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은 결국 죄인도 될 수도 없었다. 죄인이 되지 못한 그들은 당연히 주님으로부터도 자신들의 죄악을 탕감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답시고, 고아원을 찾아가서 밀린 빨래를 해주고 오거나, 또는 그들의 뒤치닥거리를 해주는 일들을 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을 위해서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한 끼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한답시고, 불쌍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쌀이나 연탄 같은 것을 사주고 오는 사람도 있고, 또는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서 말벗이 되어 주기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자기 자신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면, 이것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 아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펼치는 사랑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펼칠 대상을 내가 불쌍하다고 혹은 내가 가엾다고 하여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펼치실 주님께서 직접 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정하고 나면, 나는 좋든 싫든 거기에 따라서 주께 하듯이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펼치면 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사랑할 대상을 내가 찾는다고 하면, 나 보다 못한 사람만 불쌍히 여기게 되고 또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 대해서만 잘해주게 되니, 이것이 어찌 주님이 요구하시는 공평한 사랑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럼 잘먹고 잘사는 사람은 불쌍하지 않으니까 돌볼 필요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인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이라면 말이다. 만약에 육신으로 하는 그런 사랑이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라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인간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원수를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어떤 죄인이지 처절하게 깨닫고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죄악을 먼저 용서받아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죄악을 용서받은 자는 그때부터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아무리 몹쓸 짓을 한 원수라고 해도 마음속에서 주님이 용서해 주라고 하면 그는 주인의 말에 따라서 용서를 해주어야 한다.

본인은 상대방이 미워서 도저히 용서를 못할 것 같아도 주님이 마음속에서 용서해 주라고 하면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본인이 잘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의 힘이다. 이렇게 베푸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기분에 따라서 펼치는 사랑은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처럼 조석으로 변하게 된다. 사랑이 사람 기분에 따라서 이랬다 저랬다 아침 저녁으로 변한다면 이것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어여 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기분에 따라서 펼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없다. 

우리가 만약에 저런 자들과 같은 일을 하고자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 모두는 당장에 이곳을 그만두고 저들이 하는 일들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저들이 펼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주님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세상의 참 빛이 될 수 없다면 어둠에 있는 자들을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있는 이 땅에서 기독교인들이 펼치는 사랑하고는 그 차원이 분명히 다르다. 아직은 우리 자신도 죄악을 탕감받기 직전에 있기 때문에 온전한 것을 말할 수 없어도, 언젠가는 자신들의 죄악을 토설하고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죄악을 탕감받기 위해서,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가는 일에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공유하기
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5-02-06 20:57
조회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