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주일 설교말씀

선한 일로는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 하던 어떤 사람하나가 예수를 찾아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니라!” 그러시면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 하신다.

그러자 그 사람이 듣고 있다가 “가로되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묻는 것을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청년도 전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내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는 그 청년에게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가라사대 네가 온전(穩全)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는 것이다. 그러자 그 청년은 그제 서야 그 자리를 뜨는 것이다. 성경에는 “그 청년이 재물(財物)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청년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이 청년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히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까지도 모두 다 지켰다고 했다. 누구도 지키기 힘들다는 그런 계명들까지도 모두 다 지켰다고 한다면, 그 청년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심이 대단히 두터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율법 아래서 계명대로 산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보기에 거의 신의 경지에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계명대로 살려면 손톱만큼도 남에게 원망을 들어서도 안 되고, 또한 남에게 절대로 피해를 끼쳐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들에게 조금만 칭찬을 듣고 살아도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칭찬의 말을 듣게 되는데, 당시 엄한 율법 아래서 온갖 여러 가지 계명들을 모두 지키며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지금 그 어렵다는 계명들을 모두 다 지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은 어렵다는 그 계명들을 모두 지켰기 때문에, 자신이야 말로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 당신이 선한 선생이라고 소문이 나 있던데,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당연히 영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이 청년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거의 모두가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하나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자신은 예수를 믿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안 빼놓고 새벽기도를 다녔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주일날 친척들이 그렇게 결혼을 많이 해도 한 번도 거기에 참석지 않고 오로지 예배당을 찾았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한 푼도 안 떼어 먹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도 살기 어려운데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열 명이나 데려다 지금까지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외딴섬 나환자촌에 홀로 들어가서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때로는 그들의 피고름을 빨아주기도 하며, 때로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며 그들의 모든 뒷수발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천사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무튼 처음에는 그들도 자신들을 그런 사람들로 생각하지 않고 그런 일을 시작했으나, 자꾸만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을 착한 쪽으로 봐주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착한 사람들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자신보다 착하다고 하는데 누가 그것을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을 점점 죽음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올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던 사람들 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 아들이 찾아오셨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 아들에게 따져 묻는다. “하나님 아들이여! 우리가 무슨 착한 일들을 더 해야 영생에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아들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생명에 들어가고자 하거든 착한 일들을 더 많이 해라!” 듣고 있던 그들이 즉시 대답한다. “신앙생활 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가족처럼 돌봐주고 있으며, 또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외딴섬에 들어가서 나병 환자들의 피 고름을 빨며 그들을 돌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아주당당하게 따진다. "아직도 우리가 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까?” 하고 묻자, 아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질문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목숨을 그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영원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주마! 그렇게 하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는 것이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면서 하는 말이 “아니! 몸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죽도록 고생했으면 됐지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우리목숨까지 그들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고! 쳇 그렇게는 우리도 못하겠다.” 그러면서 그들은 죽는 것이 두려웠던지 모두 혀를 끌끌 차면서 아들 앞을 모두 떠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착한일로 영생을 얻어 보려 했지만, 인간들이 착하다고 여기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그들이 착하다고 했던 것은 결국 인간들이 착하다고 인정해준 것이지, 그것을 주님께서 인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착하다고 인정받으려면 자신의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

그러니 자신의 착한 일로, 혹은 교회 열심히 다닌 것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만 주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까짓 죄악으로 얼룩진 목숨쯤은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자신이 계명들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얻으려 하였지만, 예수께서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오라는 말에 주님 곁을 떠나갔다. 결국 그 청년에게는 영생이 재물보다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청년을 눈여겨봐야 한다. 만약에 내 목숨보다 영생이 값어치가 없어 보이면, 자신의 목숨을 보존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내 목숨보다 영생이 더 낳아 보일 것 같으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언제 죽어도 한번은 죽을 목숨이라면 육신이 살아있을 때 죽어버리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고, 지금 당장 죽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떠는 자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혹시 아직도 무슨 선한 일이나, 혹은 교회 열심히 다닌 일로 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일찌감치 보따리 싸가지고 세상 교회로 하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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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05-02-27 21:03
조회
81